[송종훈의 근대뉴스 오디세이] 잊어서는 안될 이름 '항일의병'

2021. 6. 23. 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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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종훈 19세기발전소 대표·아키비스트
송종훈 19세기발전소 대표·아키비스트

호국보훈의 달인 6월 첫날은 '의병의 날' 구한말 일제 침략에 맞서 대항한 항일의병 "어찌 제가 낯을 들고 그들을 대하겠습니까" 몸바친 분들 정당하게 보훈하는지 생각해야

6월은 '호국보훈의 달'이다. 글자 그대로 호국(護國)하신 분들에게 보훈(報勳)하는 달이다. 하지만 '호국보훈의 달'의 첫날인 6월 1일이 '의병(義兵)의 날'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임진왜란 당시 곽재우 장군이 최초로 의병을 일으킨 음력 4월 22일을 양력으로 환산한 날이다. 나라가 누란의 위기에 처할 때마다 우리 선조들은 의병을 결성해 목숨바쳐 싸웠다. 구한말과 일제 강점기때에도 마찬가지였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끝난 후 항일투쟁으로 이어진 의병을 찾아 시간여행을 떠나보자.

1909년 3월 3일자 신한민보(申韓民報)에 '피해자에 휼금(恤金; 지원금)'이란 제목의 기사가 눈에 띈다. "의병이 봉기한 이래 의병에게 피해를 당한 사람과 불탄 가옥을 조사하여, 조선황실에서 은사금(恩賜金; 임금이 백성에게 내리는 물건)을 하사하시고, 내부(內部)에서도 피해자를 조사하여 1인당 10원과 불탄 가옥에 12원씩 지급하였는데, 그 피해자 수는 한인 피해자 1,259명, 불탄 가옥은 6,648호, 일본인 피해자 125명이라 하였다."

항일의병은 구한말 일제에 대항하기 위해 분연히 궐기했다. 이들은 삼천리 방방곡곡에 선혈을 뿌리며 국권을 회복하고자 했다. 의병에 대한 소식은 전국 각지에서 들려왔다. 하지만 의병에 대한 기사는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에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대신 샌프란시스코 교민들이 1909년 발행한 신한민보에 많은 기사가 실려있다.

신한민보 1909년 3월 17일자에는 "나주 영산포 등지는 의병장 심남일, 전해산 씨 등이 횡행하는 지점인데, 그 결당(結黨; 도당을 맺음)이 200명 이상에 달하였고, 지금 의병 중에 제일 큰 세력을 가진 것은 남일파와 산해파 두 단체라더라"라는 기사가 실려있다.

1909년 4월 7일 역시 신한민보에 "지금 전라남도에서 출몰하는 의병대장은 전해산, 진남월, 박인수 등 세 명이 창의군(倡義軍)을 조직하여, 전해산 씨는 총대장이 되고, 세 단체가 도합 600여 명인데, 지금 목포 근방에 출몰하고 박사화 씨는 부하 100여 명을 거느리고 나주, 광주 등지로 횡행한다 하며, 기타 광주, 보성, 장성, 해남 등지에도 의병이 치성(熾盛; 불같이 일어남)하고 있다"라는 기사가 게재되어 있다.

의병 활동은 육지뿐 아니라 해상에서도 있었다. 1909년 5월 5일자 신한민보에 '해상 의병'이란 제목의 기사가 보인다. "4월 2일 목포해협에서 배를 탄 의병들이 일본 어선을 습격하여 일본인 2명이 포살되고 3명은 중상을 당하였다더라."

의병을 진압하기 위해 별별 계책을 쓰다가 마침내 일제는 보부상까지 이용하기로 결정한다. 당시 '장돌뱅이'로 불렸던 보부상은 상업 외에도 정치를 포함해 다양한 목적으로 운영됐었다고 한다. 다음은 '보부상 작대기 또 나온다'라는 제목의 1909년 8월 25일자 신한민보 기사다. "일본 통감부에서는 의병을 진압하기 위해 보부상을 이용하고자 보부상 단체와 전력 교섭한 결과, 7월 24일 각의(閣議)에서 경비 10만원을 지출하여 보부상을 이용하기로 내정이 되었다더라."

의병대장에겐 고액의 현상금도 걸렸다. "평안남도 지방의 유명한 적괴(賊魁) 채응언(蔡應彦)을 체포하여 평안남도 경찰서에 넘기는 자는 현상금 180원을 모두 줄 것이요, 채응언이 있는 곳을 가만히 고(告)하거나, 또는 평안남도 경찰관으로 하여금 용이하게 잡도록 하는 자에게는 그 공에 따라 각각 상금을 나눠준다고 평안남도 경무부장은 고시를 발포하였더라." (1914년 11월 13일자 매일신보)

비장하게 죽음을 맞이한 의병장의 이야기도 소개되어 있다. 1909년 7월 7일자 신한민보에 실린 '시시여귀(視死如歸;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라는 제목의 기사다. "향자(向者; 요즘)에 체포된 의병장 이군삼 씨는 16일에 사형을 집행하였는데, 단두대 위에 올라서도 안색이 불변(不變)하여 정정당당한 언사로, 동양 3국의 동맹론을 일장 연설하고, 종용(조용하다) 취사(取死; 죽음을 맞다)하였다더라."

당시의 의병을 살펴보면 대한제국의 군인 출신들이 의병으로 많이 활동했고, 대를 이어 의병 활동을 한 분들도 계셨다. 1921년 6월 17일자 동아일보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게재되어 있다. "불온문서를 산포하며 또 한편으로 군자금을 모집하고 경관을 총살하는 등 여러가지 수단 방법으로 횡행하던 독립단 일파가 평안남도 덕천, 영원, 맹산에서 일망타진 되었는데, 체포 구금된 자가 300여명에 달한다 하며 그 중에는 구 한국시대 의병대장 김관수(金觀洙)의 아들인 김병렬(金秉烈)과 그 아우 되는 김평렬(金枰烈)도 있었다."

대한제국 군인 출신으로 일제 치하 감옥에서 교도관을 했던 사람의 이야기도 눈길을 끈다. 1926년 1월 18일자 동아일보에는 군대 해산 후 서대문감옥에서 14년간 간수 노릇을 하던 박성완(朴聖完) 씨의 사연이 실려 있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먹고 살기 위하여 이 노릇을 시작하였지마는, 참말 사람으로 차마 할 수 없는 때가 많았지요. 내가 처음 감정(監丁;감옥에서 부리는 심부름꾼)으로 들어갔을 때에는 해산병들이 한창 의병이 되어서 일본 군대와 싸움을 하던 때라, 하루에도 서너 명씩, 강도죄로 징역 10년 이상을 지고 들어오는 사람들은 모두가 의병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중에는 옛날 동관(同官; 동료)이며 상관(上官)이던 사람이 태반이라, 어찌 사람의 낯을 들고 그 사람들을 대했겠습니까. 죽지 못해 출근은 하면서도 저녁나절 집으로 돌아올 때에는 자탄(自嘆; 스스로 탄식함)의 눈물이 흐를 때도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호국'에 몸 바친 분들을 찾아 기록하고 공을 기리는 것도 중요한 일이다. 하지만 과연 그 분들을 올바르고 정당하게 보훈을 하고 있는지, 정작 그렇게 할 마음은 있는지 등을 한번 곰곰히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아직도 그들의 의로운 역사는 제대로 조명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쏟아지는 여름 햇살이 '따가운 질책'처럼 느껴지는 6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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