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산은 야만이다

한겨레 2021. 6. 23. 1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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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호의 기억과 미래]

전후 65년 만에 상봉한 남북 이산가족들이 기약 없는 이별의 야속함에 금강산이 눈물바다로 변했다. 지난 2018년 8월, 8·15 계기 ‘제21차 이산가족 상봉행사’(2회차) 마지막 날인 26일 오후 금강산호텔에서 우리 쪽 상봉단이 버스를 타고 먼저 떠나는 북쪽 가족들과 작별하고 있다. 금강산/사진공동취재단

[기억과 미래] 정병호ㅣ한양대 문화인류학과 명예교수

캄캄한 새벽 이상한 소리에 잠을 깼다. 옆에서 주무시던 외할머니 자리가 비어 있었다. 창호지문 너머에서 신음인지 울음인지 할머니의 기도 소리와 라디오 방송이 들렸다. 통일 소식이 있어 ‘인민군에 끌려간(북에서는 의용군으로 자원한)’ 외아들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매일 틀어놓는 새벽 뉴스였다. 애간장을 끊는 아픔을 누르려는 듯 안간힘을 쓰며 몸을 뒤척이는 할머니의 몸짓을 느낄 수 있었다. 무섭고 슬퍼서 나도 울먹이며 다가가 뒤에서 할머니를 안았다. 눈물 젖은 얼굴을 마른 두 손으로 쓱 문질러 훔치고, 할머니는 거짓말처럼 활짝 웃어 보이며 어린 나를 와락 품에 안았다.

이산의 아픔을 안은 채 돌아가신 할머니, 어머니, 그리고 아직도 생사를 모르는 외삼촌. 어린 마음에 품었던 그 고통을 되새겨 전하기 위해 또다시 6·25를 맞아 이 글을 쓴다.

그 전쟁은 특별히 잔인했다. 휴전이 되자 전쟁포로들은 국제법의 보호를 받으며 자기 나라로 돌아갔지만, 새로운 경계에 막힌 두 나라 피난민은 고향에 돌아갈 수 없었다. 헤어진 가족들은 재결합은 물론 편지 한 통 주고받을 수 없었다. 그렇게 70년 세월이 흘렀다. 남북으로 갈린 수백만 이산가족들은 서로 생사조차 알지 못하고 한을 품은 채 늙고 죽어갔다.

이 끔찍한 상황에 대해서 남과 북은 서로 상대방에게 책임을 돌렸다. 처음엔 상대적으로 약했던 남쪽의 피해의식이 강했고, 상황이 역전되자 이번엔 북쪽이 소극적으로 대응했다. 양쪽의 권력은 억울한 주민들의 마음을 상대방에 대한 증오심을 키우는 데 이용했다. 수많은 회의와 협상은 상대방을 비난하며 결렬됐다.

때로 쌍방의 정치적 필요에 따라 이산가족 상봉행사가 열렸지만, 체제 과시를 위한 짧은 단막극으로 전락하곤 했다. 남북 언론의 화려한 조명 밑에서 수십년 생사조차 모르던 가족들의 단 한차례 만남조차 조용하게 진행할 수 없었다. 선정적 보도는 늘 다음 행사를 위협했다.

체제 경쟁 무대에 떠밀려 서게 된 이산가족들은 서로 가족의 안위를 걱정했다. 분단권력의 속성을 꿰뚫어 보고 다른 체제에서 살고 있는 가족을 위한 역할을 스스로 연출하기도 했다. 금강산에서 소규모 이산가족 상봉이 정례화되었던 2000년대 초반, 남한 사는 100세 할머니가 6·25 때 서울을 점령한 인민군에 징집되어 북으로 간 딸을 만났다. 짧은 눈물의 상봉 끝에 헤어질 무렵 할머니는 금강산에서 꽃집을 찾았다. 왜 그러시냐는 사람들의 질문에 할머니는 “가족과 떨어져 홀로 북으로 간 딸을 이렇게 살 수 있게 해주신 장군님께 꽃을 사드리려 한다”고 했다. 국가보안법의 고무찬양죄를 마구 적용하던 시대가 아니었기에 다행이었다. 서울로 돌아온 할머니는 남한에 있는 가족들에게 정권이 바뀌면 위험할 수 있으니 입단속 잘하라고 일렀다.

남한의 연좌제와 북한의 성분제의 생생한 경험은 분단시대를 살아온 할머니의 염려가 막연한 공포가 아님을 증명한다. 국가보안법이 살아 있는 한 이러한 공포는 언제든 현실이 될 수 있다. 지금도 많은 이산가족들이 다른 체제에 살고 있는 가족이 핍박을 받을까 또 여기 있는 자식들이 어려움을 겪지 않을까 자기검열을 한다. 심지어 이산가족 등록조차 꺼리는 경우가 많아 공식통계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보편적 인권을 주장하는 국제사회는 한국의 이산가족 문제에 대해서는 유독 둔감했다.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가족 생사 확인, 편지 교환, 재결합을 위해 국제적십자와 유엔을 비롯한 국제인권기구들은 과연 얼마나 진정성 있는 노력을 기울였는가? 당사국이 해결하지 못하는 인권 문제는 국제기구나 제3국, 또는 민간 차원의 중재로 길을 열 수도 있다. 그러나 협상 통로의 독점적 관리를 고집하는 남북한 당국은 다른 모든 가능성을 위험시하고 배제했다.

이산은 야만이다. 민족통일을 주장하면서 국제관계만도 못한 비상식과 야만의 현실을 70년 이상 방치했다. 차라리 두개의 국가 현실을 인정했다면 최소한 국제협약 수준의 인도적 문제 해결이 가능했을 것이다. 과연 우리 민족끼리는 이렇게 절박한 문제조차 해결할 역량이 없는 것인가?

이산가족 문제는 핵문제 해결 이후에 논할 수 있는 단계적 문제가 아니다. 상대를 무너뜨려야만 해결될 수 있는 과제는 더더욱 아니다. 치유하지 못한 이산의 상처로 남과 북은 더욱 멀어지고 있다. 다음 세대의 무관심과 혐오는 깊어지고 있다.

통일은 사건이 아니라 과정이다. 상식을 되찾고 정상적 관계를 회복해가는 과정이다. 가족 이산의 한을 품고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의 절박한 인권 문제의 해결 과정이 바로 해원과 상생의 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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