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등의 아침] 義의 고장 광주정신의 출발은 연산군 때 불의 응징한 눌재 박상

지창환 2021. 6. 23. 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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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義의 고장 광주정신의 출발은 연산군 때 불의 응징한 눌재 박상
-나주서 못된 짓 자행 우부리 격살..연산군이 총애한 애첩의 父
-'우부리 사건'으로 사약 받은 박상..중종반정으로 목숨을 구하다
-폐위 중종 첫째 부인 신비 복위 상소..반정세력에 맞서다 유배
[KBS 광주]

■ 인터뷰 자료의 저작권은 KBS에 있습니다. 인용보도 시 출처를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 프로그램명 : [출발! 무등의 아침]
■ 방송시간 : 6월 23일(수) 08:30∼09:00 KBS광주 1R FM 90.5 MHz
■ 진행 : 지창환 앵커(전 보도국장)
■ 출연 : 노성태 원장(남도역사연구원)
■ 구성 : 정유라 작가
■ 기술 : 박나영 감독


▶유튜브 영상 바로가기 주소 https://youtu.be/u5WLPqasOoQ

매주 수요일 남도 역사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 함께하고 있지요. 오늘도 남도역사연구원 노성태 원장과 함께합니다. 저희 방송은 유튜브에서도 실시간으로 시청하실 수 있습니다.

◇ 지창환 앵커 (이하 지창환): 매주 수요일 우리 지역 역사를 재밌게 들어보는 시간 함께하고 있지요. 남도역사 전문가, 남도역사연구원 노성태 원장님과 이야기 나눕니다.

◆ 남도역사연구원 노성태 원장 (이하 노성태): 안녕하십니까?


◇지창환: 오늘 역사 이야기 주제는 무엇일까요?

◆ 노성태: 광주 정신은 남도 정신이고 그것은 곧 정의로움이다, 제가 두어 번 말씀을 드렸잖아요. 그런데 광주 정신인 정의로움이 어느 시점부터 누구에게서 출발됐을까? 이렇게 단정적으로 이야기하기는 쉽지 않은데요. 많은 사람은 15세기 광주에서 출생했던 눌재 박상으로부터 찾을 수 있다 이렇게 이야기하시는 분들이 많거든요. 그래서 오늘은 광주 정신 정의로움의 출발, 이렇게 알려지고 있는 눌재 박상에 관련된 이야기를 나눠보도록 하겠습니다.

◇ 지창환: 박상하면 청취자분들 많이 낯설어하실 것 같아요. 어떤 분인지 궁금합니다.

◆ 노성태: 낯선 분이 많으실 것 같아요. 성종 5년, 1474년에 광주 서구 서창동 절골에서 태어났습니다. 원래를 아버지 박지흥은 충청도 회덕 분인데, 회덕IC 자주 나오잖아요. 세조가 왕위를 찬탈하자 관직 진출을 포기하고 부인이 처가 마을이 광주 서구 서창동의 하동정씨인데 이쪽으로 이사를 오게 되지요. 박상이 회덕이 아닌 광주에서 태어난 이유지요. 연산군 때 과거에 급제하고 병조좌랑이라든가 전라도사, 담양부사 이런 관직을 역임했던 분인데, 아무튼 이분 오늘 이야기하려고 하는 것은 이것이잖아요. 불의를 용납하지 않은 정의로운 인물. 그래서 이분이 보여주었던 여러 가지 사건 중에 ‘우부리 격살 사건’, ‘신비 복위소’ 사건이 있는데 이 두 사건은 박상이 남도 정신의 출발임을 보여주는 사건이 되는 것이지요.

◇ 지창환: 남도 의로움의 출발로 ‘우부리 격살사건’과 ‘신비 복위소’ 사건을 들었는데, 하나씩 들여다보지요. 먼저 우부리 격살 사건 무슨 말인가요?

◆ 노성태: 우부리는 사람 이름이고요. 연산군이 팔도에 채홍사를 파견하는데, 전국에 아름다운 여인들을 선발해서 임금에게 바치는 관리이지요. 나주에 내려와서 천민 우부리의 딸을 천거했는데 그 우부리의 딸이 연산군의 총애를 입게 되고 그리고 후궁이 됩니다. 그러니까 우부리가 무소불위, 딸의 권세를 믿고 나쁜 일은 다 하는 것이에요. 남의 여자 겁탈하기, 남의 땅 빼앗기... 그런데 그 우부리의 나쁜 짓을 멈추게 할 수 없습니다. 후한이 너무 두려웠기 때문에. 그래서 정3품 벼슬인 나주목사도, 종2품직인 전라도 관찰사도 그의 못된 짓을 멈추게 하지 못한 것이지요.

◇ 지창환: 우부리의 나쁜 짓, 나주목사도 전라도 관찰사도 멈추게 하지 못했는데, 박상이라는 분이 어떻게 하나 보네요?

◆ 노성태: 그렇습니다. 그 소식을 듣고 박상이 전라도사에 자원해서 전라도사가 된 다음에 나주로 내려오게 되는데요. 도사라고 하는 것은 정5품 관직인데 지방의 관리를 감찰하는 그런 관직이었습니다. 박상이 나주에 내려오니까 난리가 난 사람이 나주목에 있었던 이방, 왜냐하면 우부리의 포악한 성정도 알고 있고 박상이라는 사람이 얼마나 강직한지도 알고 있는데 둘이 붙을 것 같잖아요. 그런데 아무튼 이방이 자기 임무를 수행해야 되니까 박상한테 가서 귓속말로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언제 우부리님께 인사 가시겠습니까?’ 이렇게 하니까 박상이 호통을 치면서 포졸들에게 우부리 체포하라는 엄명을 내리게 되고 그 우부리를 체포해서 나주에 가면 금성관이라고 객사가 있습니다. 여기에서 곤장을 쳤는데 그만 우부리가 죽고 말지요. 이것을 우리가 우부리 격살 사건이라고 부르는 것이고, 불의를 응징한 사건이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 지창환: 불의를 응징한 사건이어서 광주 정신 시초로 보셨군요. 왕의 총애를 받는 애첩의 아버지를 죽였으니까.

◆ 노성태: 난리가 났지요. 우부리 집안에서는 장례도 치르지 않고 서울로 딸에게 이르러 가고요. 박상도 연산군에게 자초지종을 이야기하고 그리고 또 벌을 준다면 달게 받겠다고 올라가는 도중인데. 아무튼 올라가는 도중에 사약을 든 금부도사와 길이 엇갈리게 되고 한양에 도착하기 직전에 중종반정이 일어납니다. 이렇게 해서 목숨을 구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 지창환: 중종반정이 박상의 목숨을 살렸군요.

◆ 노성태: 그런데 또 재밌는 야사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박상이 장성 갈재를 넘어가려고 입암산 갈림길에 이르렀을 때 고양이 한 마리가 나타나서 자기 바짓가랑이 끌고 야옹하면서 다른 샛길로 따라오라는 흉내를 냈다는 것이에요. 따라갔는데 아까 말한 금부도사가, 사약을 들고 가던 금부도사와 길이 엇갈려서 살아남았다.

◇ 지창환: 고양이 때문에 살아남았네요.

◆ 노성태: 그래서 박상의 후손들은 고양이를 생명의 은인이라고 생각을 해서 묘답, 묘가 고양이잖아요. 고양이 제사를 위한 땅을 마련해놓고 일제 치하 시기까지 제사를 지냈다고 하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습니다.

◇ 지창환: 야사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러면 ‘우부리 격살 사건’ 말고 또 ‘신비 복위소’ 그것은 어떤 이야기인가요?

◆ 노성태: 조선의 왕비 중에서 가장 비운의 여인은 중종의 첫째 부인 신씨라고 하는 분이에요. 남편은 왕이 됐지만 왕이 됐기 때문에 왕비에서 쫓겨나야 했던 비운의 인물인데 사연은 이런 것입니다. 신씨 아버지가 신수근인데 당시 좌의정이었고요. 연산군의 처남이면서 중종의 장인이었으니까 실세 중의 실세였겠지만 반정공신인 박원종이 신수근에게 반정 참여를 요구했지만 거절하다 척살, 죽였는데 그 신수근의 딸이 왕비가 되잖아요. 그러니까 자신들이 위태로워질지 모른다고 생각을 해서 힘없는 중종을 협박해서 쫓아내게 합니다. 그래서 중종이 힘이 없잖아요. 초창기에. 그래서 어쩔 수 없이 7일 만에 신비를 쫓아내게 되고 그리고 두 번째 부인이 장경왕후 윤씨인데 이 윤씨가 훗날 인종이 되는 왕자를 낳고 또 일주일 만에 죽고 말지요.

◇ 지창환: 왕비가 신하들의 겁박에 의해서 쫓겨났는데 박상이 이번에도 가만있지 않았나요?

◆ 노성태: 가만있었다면 오늘 제가 이야기를 안 드렸겠지요? 이때 담양부사였던 박상이 목숨을 걸고 상소를 올리게 되는 것이지요. 새 중전 뽑지 말고 10년 전에 폐위돼서 쫓겨난 신씨를 복위시키고, 그리고 반정공신의 공은 인정하지만 지아비로 하여금 지어미를 쫓아내게 해서 인륜을 범한 죄가 더 크기 때문에 반정공신들의 관직을 삭탈하고 그리고 쫓겨난 신비를 복위시키라고 하는 상소가 신비 복위소인 것이지요. 그러니까 인륜이 폭정을 바로 잡은 행위보다 더 중한 것. 그러니까 정의로운 것이라고 박상은 본 것이지요.

◇ 지창환: 살아 있는 권력에 당당히 할 말을 한 것이군요. 당시 살아 있는 권력에 맞섰던 상소의 후폭풍이 만만치 않았을 것 같은데요.

◆ 노성태: 그렇습니다. 신비복위소로 조정은 격렬한 논쟁에 휩싸였고 또 권력을 장악했던 반정공신 측에 의해 박상은 굉장히 중벌에 처해질 분위기였지만 우리가 아는 조광조 등의 간언으로 남평으로 유배가는 것으로 마무리되는데요. 이때 조광조가 신비복위소에 대해서 강상의 법도를 세웠다, 인륜의 법도를 세웠다고 크게 칭찬을 하게 되지요.

◇ 지창환: 이렇게 쫓겨났던 신비를 복위시켜라 박상이 상소를 했는데 그 이후에 어떻게 됐습니까?

◆ 노성태: 7일 만에 쫓겨났고 10년 후에 박상 등이 복위를 주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요. 영조 16년 1740년이니까 폐위된 지 234년 만에 단경왕후로 추증이 돼서 명예가 회복됩니다. 그러니까 정의가 234년 만에 승리한 것이지요.

◇ 지창환: 지금 광주에 박상의 흔적이 남아 있나요?

◆ 노성태: 네. 눌재로라고 박상의 호를 딴 거리명이 있고요. 그리고 송호영당이라고 영정을 모시는 사당이 있고, 그리고 사직공원에 박상이 시인이기도 한데 그분의 시를 새긴 시비 등도 남아 있습니다. 생가는 서창동 절골에 있습니다.

◇ 지창환: 알겠습니다. 살아 있는 권력에도 굴하지 않았고 의를 위해서 뜻을 굽히지 않았던 눌재 박상 선생을 광주 정신 시초로 보신다. 청취자 여러분은 어떻게 들으셨습니까? 오늘 이야기 참 재밌었던 것 같습니다. 남도 역사이야기, 오늘 말씀은 여기까지 듣고 다음 주 수요일에 또 뵙도록 하겠습니다.

◆ 노성태: 감사합니다.

◇ 지창환: 지금까지 남도역사연구원 노성태 원장과 이야기 나눴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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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창환 기자 (2su3san@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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