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정식 기자와 평양 함께 걷기] 한반도 통일 방안, '남북연합'을 다시 보다 ①
각각의 정권마다 통일 방안을 발표하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전두환 정부의 '민족화합 민주통일 방안', 노태우 정부의 '한민족공동체 통일 방안', 김영삼 정부의 '민족공동체 통일 방안'. 북한에서도 '고려연방제 통일 방안'을 주장했습니다.
정부 차원에서 이같이 발표되던 통일 방안은 남북 화해의 물꼬를 텄던 김대중 정부 시기부터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남북 통일은 통일 방안을 마련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남북 간 화해 협력을 통해 통일의 기반이 조성되어야 가능한 것이라는 인식이 확산됐기 때문입니다.
통일 방안이라는 도식적인 틀이 별다른 의미가 없다는 것에 대한 깨달음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통일 방안에 대한 개념적인 논의가 완전히 의미 없어진 것은 아닙니다. 만약 통일을 실질적으로 논의할 시점이 온다면, 어떤 과정을 거쳐 통일로 갈 것인가 하는 개념적 틀이 있어야 통일 작업을 진행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남북연합' 개념의 등장
남북연합, 국가연합, 연방제
먼저 국가연합과 연방제에 대해 간단히 살펴보겠습니다.
국가연합의 대표적인 사례는 유럽연합(EU)입니다. 개별 국가들이 각자 주권을 보유하면서도 조약을 통해 일부 권한을 초국가기구에 양도한 사례입니다. 유럽연합 발전 과정에서 만들어진 최초의 초국가기구는 1952년 설립된 '유럽석탄철강공동체(ECSC)'였는데, 구성국들의 석탄, 철강산업에 대한 관리권을 위임받았습니다. ECSC에 가입한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등 6개국은 ECSC의 결정에 따라 석탄과 철강 생산량을 정하고 가격도 책정했습니다. 석탄과 철강 분야에 한해서는 이들 나라의 주권이 ECSC에 이양된 것입니다.
하지만 국가연합은 한정된 분야에 대해서만 주권을 이양하는 만큼, 국제법상의 주체는 국가연합이 아니라 개별 구성국입니다.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가 유럽연합의 구성국들이지만, 엄연히 개별국가로 활동하고 있고 상호 외교관도 파견합니다. 특히 외교와 국방 권한을 각 구성국들이 독자적으로 행사한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반면, 연방제는 개별 구성국들이 아예 하나의 국가로 통일된 경우라고 볼 수 있습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미국입니다. 연방국가는 기본적으로 하나의 국가인 만큼 국제법상의 주체는 개별 구성국이 아니라 연방국가 자체이며 구성국 사이에 외교관을 파견하지도 않습니다. 미국의 각 주들이 다른 주에 외교관을 파견하지 않는 것이 하나의 사례입니다. 외교와 국방 권한도 각 구성국이 행사하는 것이 아니라 연방국가가 행사합니다. 다만 미국의 각 주들이 주의회와 주정부, 주법원을 가지고 상당한 자율권을 행사하듯이 연방국가의 개별 구성국은 상당한 자율권을 행사하는 주체입니다.
남북연합 개념의 모호성
먼저, 남북연합은 남북정상회의와 남북각료회의, 남북평의회 같은 남북 간 협의기구만 가진 반면, 국가연합은 구성국들의 주권 일부를 이양 받는 초국가기구가 존재한다는 측면에서 보면 국가연합이 훨씬 결합력이 높다고 볼 수 있습니다. 결합력의 순서대로 나열하면 남북연합-국가연합-연방제의 순서가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노태우 정부 당시 대통령 사회보좌역이었던 김학준 전 서울대 교수는 남북연합의 초기 버전인 남북한 체제 연합이 국가연합과 연방제 사이에 놓여 있다고 진단했습니다. 국가연합은 개별 구성국들이 별도의 주권을 갖고, 연방제는 구성국들 대신 연방중앙정부가 주권을 갖는 데 비해, 남북연합은 남북이 개별적인 주권을 가지면서도 남북 간 관계가 국제관계가 아닌 민족 내부의 특수관계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주장에 따르면 결합력의 순서는 국가연합-남북연합-연방제의 순서가 됩니다.
남북연합 단계를 거쳐 달성하게 돼 있는 통일국가의 형태도 다소 모호한 부분이 있습니다.
한민족공동체통일방안에 따르면 남북연합을 거쳐 달성되는 통일국가는 단방제 국가(a unitary state)입니다. 단방제는 두 개 이상의 구성국을 가지는 연방제에 대조되는 개념인데, 한민족공동체통일 방안을 발표한 노태우 정부가 대조의 대상으로 삼은 것은 북한의 고려연방제입니다. 북한이 주장하는 고려연방제가 아니라 자유민주주의 체제로의 통일을 지향한다는 측면에서 단방제를 통일국가의 형태로 제시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남북연합이나 국가연합을 거쳐 형성되는 통일국가는 연방제 국가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미국과 독일 사례에서 보았듯이 개별 구성국의 주권이 보장되는 국가연합 체제에서 통일국가로 간다면 중앙집권국가보다는 개별 구성국의 자율성이 최대한 보장되는 연방국가로 갈 가능성이 높은 것입니다.
종합적으로 정리해보면
첫째, 결합력의 정도로 보면 초국가기구의 형성을 전제로 하는 국가연합이 남북연합보다 강도 높은 결합 체제로 볼 수 있습니다. 남북연합의 개념이 다소 모호하지만, 남북연합은 남북정상회의나 각료회의 등을 통해 남북협의가 제도화되는 단계, 국가연합은 이런 제도화된 틀을 통해 남북이 특정 분야의 주권을 초국가기구에 이양하는 단계로까지 결합력이 발전한 경우로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둘째, 남북연합 개념을 제시한 한민족공동체 통일 방안에서 통일국가의 최종적 형태로 단방제 즉 중앙집권국가를 제시했지만, 남북연합이나 국가연합 과정을 통해 형성되는 통일국가는 연방제 국가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개별 구성국의 자율성이 최대한 보장되는 연합체제에서 하나의 국가로 이행한다면 중앙집권국가보다는 연방제 국가로 가는 것이 자연스러운 흐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다만, 이 흐름은 구성국들이 결합력을 높여가는 과정이 순조롭게 진행된다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국가연합이나 연방제 국가로 발전하는 과정이 반드시 순조롭게 진행된다는 보장은 없기 때문입니다. 남북연합이나 국가연합 단계, 연방제 국가를 이룬 뒤라도 개별 구성국들 사이에 갈등이 심화된다면 남북연합-국가연합-연방제 국가로의 이행 과정은 언제라도 중단될 수 있습니다. 역사적으로도 많은 사례가 이를 실증합니다. 다음 글에서는 이러한 실례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번 글을 마치기에 앞서 마지막으로 덧붙일 점은 지금까지 언급한 연방제를 북한의 고려연방제와 혼동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북한이 고려연방제를 주장하면서 연방제를 북한의 논리라고 잘못 생각하는 분들이 있는데, 연방제는 이데올로기와는 관계없는 개념입니다. 미국이 연방제를 채택하고 있다는 점만 봐도 연방제와 사회주의는 관계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북한의 고려연방제는 남과 북의 사상과 제도를 그대로 둔 채 연방국가를 구성하는 1국가 2체제를 상정하고 있는데, 체제와 이념을 달리하면서 하나의 국가를 이루는 것은 불가능한 만큼 현실성이 없는 방안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안정식 기자cs7922@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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