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진이와 쌍벽을 이루며 만인의 사랑을 받았던 기녀 시인

2021. 6. 22. 2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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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안군 부안읍 매창로에 조성된 ‘매창공원’. 황진이와 쌍벽을 이룬 조선의 명기 매창과 관련된 숱한 이야기들이 살아있는 부안의 명소이다.

「이화우(梨花雨) 흣날릴제 제 울며 잡고 이별한 님
추풍낙엽(秋風落葉)에 저도 나를 생각하는가
천 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괘라」

초봄 배꽃 필 때 떠난 님이 늦가을 낙엽 지는데도 소식이 없네. 사랑은 천리의 먼 길, 혹은 봄과 가을만큼의 거리. 꿈은 꽃이었다가 낙엽이 되어 바람에 날리고 있네. 고교 교과서에 실려 누구나 한번 쯤 들어보았을 ‘매창’의 시조. 고아(高雅)한 맛이 있다. 매창은 기녀 시인이고, 여기 나오는 님은 천민 시인 유희경이다.

부안의 매창공원 안에 있는 매창 테마관이다. 현판에 ‘매창화우상억재(梅窓花雨相憶齋)’라 쓰여 있다. ‘매화꽃 핀 창가에 꽃비가 내릴 때 서로가 서로를 그리워하는 집’이라는 뜻으로 매창의 이름과 시조에서 단어를 취해 만든 말이다.

매창(梅窓 1573~1610)은 전북 부안현의 아전이던 이탕종의 딸로 태어났다. 그해가 계유년이어서 따로 이름 지을 것도 없이 ‘계생(癸生)’이라 불렸다. 애칭이 ‘계랑(癸娘)’이다. 모친 기록은 없는데 기녀이거나 관비일 것으로 추측한다. 아버지에게서 글과 시문과 거문고를 익혔고, 출신 성분 때문에 자연스레 기생이 되었다. 그녀는 절개가 곧았다고 한다.

이수광의 <지봉유설>에 전하는 한 대목. ‘계랑은 부안의 천한 기생인데 스스로 ‘매창’이라고 호를 지었다. 언젠가 지나가던 나그네가 그 소문을 듣고는 시를 지어서 집적대었다. 계랑이 곧 그 운을 받아서 응답하였다.
「떠돌며 밥 얻어먹는 법이라곤 평생 배우지 않고/ 매화나무 창가에 비치는 달그림자만 나 홀로 사랑했다오/ 고요히 살려는 나의 뜻을 그대는 아지 못하고/ 뜬 구름 손가락질하며 잘못 알고 있구려」라고 했더니 그 사람은 서운해 하면서 가 버렸다. 계랑은 평소에 거문고와 시에 뛰어났으므로 죽을 때도 거문고를 함께 묻었다고 한다.’    

매창 공원 안에 있는 이매창의 묘. 조선의 뛰어난 여류시인으로 한시와 시조 58수를 남겼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매창의 첫사랑은 촌은(村隱) 유희경(1545~1636)이다. 천민 출신이지만 시를 잘 지어 영의정 박순 등 사대부들과 교유했다. 예법에 밝아 나라의 큰 장례나 사대부가의 상례를 주관하는 예관으로 이름이 높았다. 유희경이 부안을 여행하던 중 서울까지 이름 난 계생의 소문을 듣고 찾아간다. 계생이 “유희경과 백대붕(천민 출신 시인) 가운데 어느 분이십니까?”라고 물으니 스스로를 밝히고 함께 시와 술로 밤을 지새운다. 유희경이 28세 많은 나이이나 도인의 풍모를 지녔다고 한다. <촌은집>에는 ‘그때까지 기생을 가까이 하지 않았지만 이때 비로소 파계하였다. 서로 풍류로써 즐겼는데 계생 또한 시를 잘 지어 <매창집>을 간행하였다’는 대목이 전한다. 

「남국의 계랑 이름 일찍이 알려져서/ 글 재주 노래 솜씨 서울까지 울렸어라/ 오늘에사 참 모습을 대하고 보니/ 선녀가 떨쳐입고 내려온 듯 하여라」 유희경은 이 시를 지어주었다. 그러나 그들의 사랑은 봄 날 배꽃만큼이나 잠깐, 유희경이 상경하고는 긴 이별이었다. 그 즈음 임진왜란이 일어나 유희경이 의병으로 종군하면서 둘의 소식은 완전히 끊겼다. 매창은 시를 짓고, 또 지으면서 오랫동안 절개를 지켰다.

매창의 시조 ‘이화우’를 새긴 시비. 이 시조는 우리 고교 교과서에도 실려 있는, 그의 시편 중에 걸작으로 꼽히는 작품이다.

‘신축년(1601) 7월, 부안에 이르렀다. 비가 몹시 내렸으므로, 객사에 머물렀다. 고홍달(高弘達)이 와서 뵈었다. 기생 계생은 이귀의 정인이었는데 거문고를 끼고 와서 시를 읊었다. 얼굴이 비록 아름답지는 못했지만, 재주와 흥취가 있어 함께 얘기를 나눌만 하였다. 하루 종일 술을 나눠 마시며 서로 시를 주고받았다. 저녁이 되자 자기의 조카딸을 나의 침실로 보내주었으니, 경원하면서 꺼리었기 때문이다.’

허균의 <조관기행>에 나오는 대목이다. 유희경과 이별 이후 두 번째 사랑이 김제 군수를 지낸 이귀(李貴)였던 것 같다. 허균은 이귀의 후배로, 매창이 그의 정인이었음을 알고 있었기에 왼 종일 술과 시를 나누면서도 함께 잠자리에 들지는 않았다. 이귀는 명문가 출신으로 율곡의 제자였으며 군수인데다 글재주까지 뛰어났으니, 둘 사이에 연정이 싹텄음은 자명하지만 기록으로 남아있는 것은 없다.

세 번째 사랑이 허균이다. 허균과는 선을 넘지 않은 정신적인 사랑이어서 더 애틋하다. 허균은 1601년 매창과 첫 만남 이후 1608년 광해군이 즉위하면서 파직되어 전국을 유랑하던 때에 매창이 있던 부안으로 내려온다. 그때 다시 만난 둘 사이에 염문이 돌기도 했다. 하지만 허균이 다시 출사하여 매창에게 보낸 편지, ‘만일 그때에 조금이라도 다른 생각이 들었더라면, 우리가 이처럼 십년씩이나 가깝게 지낼 수 있었겠느냐’는 내용으로 보아 둘은 끝까지 정신적 연인으로 남아 있었던 듯하다.

매창의 일생을 테마별로 구성한 매창 테마관 내부.

이후 전라도 관찰사로 부임한 한준겸이 매창에게 지어준 칠언절구, 광해군의 처남을 풍자한 시를 지었다가 역모로 얽혀 죽은 시인 권필이 매창을 ‘여반(女伴, 여자친구)’이라고 존중하여 표현한 한시, 부안현감을 지낸 허균의 처족 심광세가 매창과 각별하게 지내며 남긴 시편 등 매창과 관련한 몇 편의 시가 남아있다. 

매창이 서른 넘어 기녀로서 낙엽 같은 신세가 되었을 때, 유희경은 부안으로 매창을 찾아온다. 그의 시에 ‘정미년간 다행히도 서로 만나…’이런 대목이 있는 것으로 보아 1607년, 매창이 죽기 3년 전이다. 두 사람은 15년 만에 다시 만나 열흘을 함께 지냈다. 「헤어진 뒤로는 다시 만날 기약을 못해/ 초나라 구름 진나라 나무가 꿈속에서도 그리워라/ 어느 때에야 우리 함께 동쪽 누각에 기대어 달을 보랴/ 전주에서 술에 취해 시 읊던 일이나 이야기할 밖에」 유희경에 매창을 위해 쓴 이 시 이후로 두 사람은 다시 만나지 못했다. 

매창은 1610년 부안읍 봉덕리 공동묘지에 거문고와 함께 묻혔다. 향년 37세. 지금의 ‘매창공원’이 들어서 있는 곳으로 ‘매창이뜸’이라고 불린다. 그가 죽은 뒤 45년이 지나 부안의 문인들이 그의 무덤 앞에 비석을 세워주었다. 그들은 당시 매창의 시가 사라지고 없는 것을 부안 고을 아전들이 전해 외던 58편을 채록하여 목판에 새겨 시집 <매창집>도 발간했다. 1917년 부안 시인들의 모임인 ‘부풍시사’에서 마모된 비석을 다시 세우고 ‘명원 이매창지묘(明媛李梅窓之墓)’라고 새겨 넣었다.

시인들이 매창의 무덤을 돌보기 전에는 마을의 나무꾼들이 해마다 벌초를 해왔다고 한다. 또 남사당이나 가극단, 유랑극단이 들어올 때에도 읍내에서 공연을 하기 전에 꼭 이곳 ‘매창이뜸’, 매창의 무덤을 찾아 한바탕 굿판을 벌였다고 한다.’(허미자 교수)

이렇듯 매창은 사대부가의 관료 문객들로부터 향리의 시인들, 평민과 더 낮은 천민에 이르기까지 신분을 초월하여 두루 사랑을 받은 시인이었다. ‘북의 황진이, 남의 매창’으로 불리며 당대 여류 시인으로 황진이와 쌍벽을 이룬 매창, 가늘고 약한 선으로 자신의 숙명을 그대로 읊고 자유자재로 시어를 구사하여 만인의 사랑을 받았던 기녀 시인.

매창 사후 그의 시가 사라지고 없었던 것을 부안 고을 아전들이 전해 외던 58편을 채록하여 목판에 새겨 만든 시집 <매창집>.

허균은 매창의 부음을 듣고 그를 슬퍼하는 글을 남겼다. ‘계생(桂生)은 부안 기생인데, 시에 능하고 글도 이해하며 또 노래와 거문고도 잘했다. 그러나 천성이 고고하고 개결(介潔 깨끗하고 굳음)하여 음탕한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나는 그 재주를 사랑하여 교분이 막역하였으며 비록 담소하고 가까이 지냈지만 난(亂)의 경에는 미치지 않았기 때문에 오래가도 변하지 않았다. 지금 그 죽음을 듣고 한 차례 눈물을 뿌리고서 율시 2수를 지어 슬퍼한다.’ 

추사(秋思), 매창의 시 가운데 절창으로 꼽히는 시편이다.
「어젯밤 찬 서리에 기러기가 울어예니
님의 옷 다듬질하던 아낙네는 남몰래 다락에 올랐네
하늘 끝까지 가신 님은 편지 한 장도 없으니
높다란 난간에 홀로 기대어 남모를 시름만 깊어지네」

◆ 이광이 작가

언론계와 공직에서 일했다. 인(仁)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애인(愛人)이라고 답한 논어 구절을 좋아한다. 사진 찍고, 글 쓰는 일이 주업이다. 탈모로 호가 반승(半僧)이다. 음악에 관한 동화책과 인문서 ‘스님과 철학자’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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