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말 안다고 우쭐하다 '고려인 문화' 수준 깨닫고 부끄러웠죠"

안관옥 2021. 6. 22.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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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짬][짬] 광주 월곡고려인문화관 김병학 관장

지난 17일 광주 월곡고려인문화관에서 김병학 관장이 전시중인 고려인 강제 이주를 상징하는 타일벽화 작품을 소개하고 있다. 사진 안관옥 기자

“작품을 쓸 수 있는 언어는 적어도 어머니의 젖과 함께 (우리의) 몸과 넋에 밴 말이어야 한다.”

지난 17일 만난 광주 월곡고려인문화관 김병학(56) 관장은 고려인 작가 한진(1931~93)의 원고 중 한 대목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전했다. 러시아 연해주와 중앙아시아에 사는 고려인의 모국어에 대한 간절함을 압축한 표현이었다. ‘우연과 운명’에 따라 고려인 문화에 관심을 갖게 됐다는 그는 작가들의 행적과 작품 내용을 줄줄이 꿸 정도로 강한 애착을 보였다.

월곡고려인문화관 ‘결’은 지난달 20일 ‘세계인의 날’에 문을 열었다. 러시아 연해주~중앙아시아~한국으로 이어지는 디아스포라(흩어진 사람들이라는 뜻의 그리스어)의 150년 여정을 살피려는 시민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소장 자료 1만2천여점 가운데 한진의 5·18 희곡 <폭발>과 강제이주 고발소설 <공포>, 극작가 김해운(1909~81)의 전통극 <장화와 홍련> 등 수고(친필원고) 23점은 지난해 1월 국가기록물로 지정되는 등 가치를 인정받았다.

지난 5월20일 열린 광주 광산구 월곡고려인문화관 ‘결’ 개관식. 월곡고려인문화관 제공

1992년 전남대 졸업 뒤 카자흐스탄으로
한글학교 교장·기자 등으로 25년 정착
한글로 쓴 지식인들 작품·인품에 매료
수집한 자료 보존방안 찾아 2016년 귀국
지난달 문화관 개관해 1만2천여점 소개

“연해주·중앙아시아로 모국어 지평 넓혀”

1992년 9월5일 카자흐스탄 우슈토베에서 열린 광주한글학교 개교식 때. 두번째줄 맨 가운데 양복차림이 김병학 관장이다. 사진 김 관장 제공.
2003년 카자흐스탄의 한글신문인 <고려일보> 창간 80돌 기념 때. 뒷줄 맨가운데가 당시 기자로 일하던 김병학 과장이다. 사진 김 관장 제공

전남 신안 임자도 출신인 김 관장은 1992년 전남대 법대를 졸업했다. 국외여행 자유화 이전부터 외국에서 1년 살아보기, 배 타고 태평양 돌기, 책 한권 쓰기 등을 꿈꿨다는 그는 대학 4학년 때 재외동포를 연구하는 임채완 교수의 강의를 들으며 인생 행로를 바꾸게 됐다. 1991년 옛 소련이 붕괴하자 광주에선 그 후신인 독립국가연합(CIS) 5개 나라에 한글학교를 세우려는 움직임이 일었다. 1년 정도 경험을 쌓아보자고 생각한 그는 졸업 직후 신생독립국 카자흐스탄의 우슈토베로 날아갔다. 1937년 스탈린이 연해주 동포들을 강제로 이주시켜 조성한 첫번째 정착지였다. 그길로 그는 무려 25년 동안 카자흐스탄에 머물렀다. 우슈토베와 수도 알마티를 오가며 한글학교 교사·교장, 알마티대 한국어과 강사, 한글신문 <고려일보> 기자 등으로 일했다.

“처음 카자흐스탄에 갔던 27살엔 특권의식이 있었던 것 같아요. 한국은 서울올림픽과 경제개발로 선망의 국가였거든요. 더욱이 신분이 교육자였기 때문에 남다른 대우를 받았어요. 그래서 공용어인 러시아어도, 현지어인 카자흐어도 배우려 하지 않았었죠.”

하지만 <고려일보>에 근무하며 고려인 지식인 정상진·강태수·김준·한진·리진 등의 인품과 작품을 접하면서 그의 태도는 180도 달라졌다. 그는 “여태껏 품었던 우쭐함이 부끄러웠다”며 “이분들은 지적으로 뛰어나고 겸손했다. 내면의 지성이 상상을 초월했다. 집단지성이 빚어낸 문학과 예술 앞에서 저절로 존경하는 마음이 커졌다”고 회고했다.

이후 그는 스스로 안주하게 했던 ‘서울말을 구사하는 사람’, ‘명정(죽은 이의 성씨와 관직 등이 기재돼 장례식에서 상여를 인도하는 기)을 쓸 줄 아는 사람’이라는 규정을 벗어나려 애썼다. 강제이주 70돌이었던 2007년 작곡가 한야코프와 함께 편찬한 역작 <재소 고려인의 노래를 찾아서>가 분수령이 됐다. 1000여곡의 연원·시기·의미 등을 정리하는 데 무려 3년이 걸렸다. 활동 범위는 중앙아시아를 넘어 연해주와 사할린으로 확대됐다. 능력의 한계를 두고 고민할 때마다 “너 아니면 할 사람이 없다. 네가 반드시 끝내야 한다”라는 평론가 정상진(1918~2013)의 응원이 큰 힘이 됐다.

이 작업을 마치자 고려인 사회에서 좋은 평가가 나왔다. 곳곳에서 원고 정리와 자료 출판을 요청해왔다. 노래를 정리하느라 너무 힘들었던 그는 그때마다 거절했지만, 누구도 대신할 수 없다는 간청에 번번이 다시 떠맡을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만든 책이 북한 출신 2세대 고려인 한글작가인 한진의 <한진전집>과 <한진의 삶과 문학>을 비롯해, <김해운 희곡집>, <경천아일록>(독립투사 김경천 장군 진중일기), <사할린 미즈호 마을의 비극> 등 20여권에 이르렀다. 그 자신의 시집 <천산에 올라>(2005년), <광야에서 부르는 노래>(2012년), 에세이집 <카자흐스탄의 고려인들 사이에서>(2009년) 등도 펴냈다.

달라진 그는 푸시킨 등의 시 60여편을 암송하며 러시아어를 열심히 익혔다. 러시아시에 매료된 그는 내친김에 카자흐스탄의 문호 아바이의 시 100편을 번역해 시집 <황금천막에서 부르는 노래>를 내는 등 시집 4권을 한국어로 번역했다. 이 공로로 지난 2월엔 카자흐스탄 국립아카데미 중앙도서관에서 주는 ‘국민의 존경’ 메달과 카심 조마르트 토카예프 카자흐스탄 대통령의 감사장도 받았다.

김병학 관장은 지난 2월 카자흐스탄 국립도서관에서 주는 ‘국민의 존경’ 메달을 받았다. 사진 김 관장 제공

그는 “알마티에서 살던 한진씨가 1992년 통역으로 우슈토베에 왔었다. 그때 수첩에 내 이름과 연락처를 적어드린 적이 있었다. 2010년 유가족의 부탁으로 원고를 정리하면서 그의 수첩에서 내 이름을 발견하고는 가슴이 뭉클했다”며 “모든 게 우연처럼 보여도 필연인 듯하다”고 숙연해 했다.

김 관장은 지난 2016년말 수집한 유적들을 보존할 공간을 찾아 광주로 돌아왔다. 그는 입버릇처럼 고려인의 지극한 모국어 사랑을 강조해왔다. 그들이 20~30년대에 모국어로 운영하는 사범대학과 연극극장을 처음으로 세웠고, 민족학교 380곳과 작은 도서관 200곳, 한글신문 17개를 운영했다는 사실을 되뇐다.

전시관을 소개한 그는 “고려인은 쌀을 일구면서도 책을 놓지 않았다. 이를 통해 공동체를 유지했고, 항일투쟁에 뛰어들었다”며 “이런 전통을 이어가기 위해 올해는 고려사범대 개교 90돌을, 내년엔 고려극장 설립 90돌을 기념하는 한편, 당시 인물들을 발굴해 특별전도 마련하겠다”고 다짐했다.

“고려인 문화는 모국어의 성취 가운데 역사적·공간적·언어적으로 가장 주목할 부분 아닌가요. 멸실되기 전에 원자료를 발굴해 수집하고 디지털화하는 작업을 꾸준하고 조용하게 진행해야죠.”

안관옥 기자 okah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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