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재근의 문화집기] 방탄소년단 선행에 재 뿌린 번역

2021. 6. 22. 1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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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재근 문화평론가
하재근 문화평론가

방탄소년단이 얼마 전 자체 웹예능 프로그램인 '달려라 방탄'을 통해서 김치 홍보 방송을 진행했다. 백종원 대표를 초빙해서 김치를 만들고, 먹는 모습을 내보낸 것이다. 방탄소년단은 세계 최고의 팝스타이기 때문에 그들의 방송엔 세계적인 파급력이 있다. 이번 방송으로 김치가 한국 문화라는 걸 많은 세계인이 더 확실하게 알게 됐을 것이다.

최근 중국 일각에서 김치가 중국의 파오차이로부터 발원했다는 억지 주장이 나오는 시점이기 때문에, 방탄소년단의 이런 행보에 더 큰 의미가 있다. 프로그램 속에서 백종원은 김치에 젓갈이 들어간다고 설명했는데, 세계에서 동물성 젓갈이 들어가는 채소 절임 음식은 우리 김치가 유일하다고 한다. 그러므로 젓갈 설명을 통해 우리 김치가 중국의 파오차이와 엄연히 다른 음식이라는 게 분명해진 셈이다.

그동안 문제는 말도 안 되는 억지 주장을 하며 우리 문화를 침탈하는 중국 일부 누리꾼의 숫자가 너무 많다는 점이었다. 그들이 인해전술로 인터넷에서 선전전을 펼치면 외국인들이 중국인들의 주장에 넘어갈 수 있다. 이럴 때 엄청난 영향력을 가진 방탄소년단 같은 국제 스타가 나서면 중국 누리꾼들의 억지 주장에 대응하는 데 큰 힘이 될 것이다. 그래서 방탄소년단의 이번 김치 방송은 큰 찬사를 받았다.

그런데 황당한 문제가 터졌다. 해당 방송의 중국어 번역 자막에서 김치를 파오차이라고 표기했다는 것이다. 이러면 결국 이 방송을 중국어 자막으로 시청한 중화권 누리꾼들은 방탄소년단이 파오차이 방송을 한 것으로 오인할 수 있다. 기껏 김치 방송을 했는데 자막으로 파오차이 방송을 만들어버린 것이다.

이 프로그램은 네이버 브이앱을 통해 송출됐다. 네이버 측은 '문화체육관광부의 훈령을 참고해 번역 전문가들이 이같이 번역했다'고 해명했다. 실제로 문체부가 지난해 7월에 '공공 용어의 외국어 번역·표기 지침' 훈령을 제정했는데, 이 훈령의 제4조는 '중국에서 이미 널리 쓰이고 있는 음식명의 관용적인 표기는 그대로 인정한다'는 내용이다. 그러면서 김치찌개 번역의 예시로 파오차이를 제시하고 있다. 네이버와 번역 전문가들은 이 훈령을 참고했다는 것이다.

일단 문체부가 황당하다. 원론적으로 언어는 상대국에서 쓰는 방식을 존중하는 게 맞긴 하다. 하지만 김치와 파오차이 문제는 단순한 언어의 차원이 아니다. 중국 일각에서 한국의 김치가 자기들 파오차이의 일부라며 문화침탈을 감행했기 때문에, 우린 파오차이와 분명히 구분되는 김치의 독자성을 지켜야 하는 상황이 됐다.

바로 그래서 김치를 섣불리 파오차이라고 규정하면 안 되는 것인데 문체부 훈령에는 이런 상황의 엄중함에 대한 인식이 없어 보인다. 올 상반기에 인터넷에서 중국의 김치 침탈 이슈가 뜨거웠었다. 이렇게까지 일이 커졌는데도 대한민국 문체부가 아직까지도 조치를 취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 의아하다.

네이버의 대응도 아쉽기는 마찬가지다. 네이버는 한국 최대 포털 사이트로 웬만한 언론 기관보다도 영향력을 크게 미치는 곳이다. 네이버 영상은 해외인들이 한국을 인식하는 창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그런 정도의 플랫폼이라면, 김치 파오차이 이슈 정도는 스스로 알아서 자막에 반영했어야 한다.

번역 전문가들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누리꾼들도 다 알고 공분하는 이슈가 중국의 문화침탈 이슈인데, 정작 중국어 전문가들이 그런 이슈도 모르고 김치를 파오차이로 번역했다는 말인가? 문체부, 네이버, 번역 전문가, 총체적 난국이다. 문체부는 빨리 이 문제를 정리해야 한다. 번역 전문가와 포털도 문체부만 바라볼 것이 아니라 알아서 중국의 문화침탈에 대응하는 번역지침을 만들어나가야 한다.

중국은 큰 시장이다. 그래서 엔터테인먼트 업계에선 중국시장의 눈치를 많이 본다. 심지어 대중무역전쟁을 벌이는 미국 헐리우드 영화사들조차 중국의 비위를 거스르는 표현은 하지 않으려고 할 정도다. 전 지구적으로 활동하는 방탄소년단도 중국시장을 신경쓸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번 방탄소년단 김치 방송에 의미가 크다. 방탄소년단은 얼마 전 한복을 입고 노래하기도 했다. 자칫 중국시장에서 미운 털이 박힐 수 있는데도 예민한 이슈들을 거침없이 건드리며 선한 영향력을 펼친 것이다. 그런 방탄소년단을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김치를 파오차이로 번역해 우리 기관이 재를 뿌린 셈이 됐으니 어처구니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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