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문제 파악도 못 한 채 한국에 상장하라는 거래소

노자운 기자 2021. 6. 22. 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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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이사들을 불러 모으면 뭘 하나요? 문제의 본질도 모르는데.”

투자은행(IB) 업계의 한 관계자는 지난 18일 한국거래소의 ‘비상장 K-유니콘(기업 가치가 1조원이 넘는 기업) CEO 대상 간담회’에 대해 이 같이 평가했다. 차관급 인사인 한국거래소 이사장이 비상장사의 대표이사들을 만나 상장 유치에 적극적으로 나선 만큼 긍정적인 평가가 뒤따를 것으로 기대했는데, 현장 반응은 예상과 전혀 달랐다.

이날 손병두 이사장은 유니콘 기업들의 국내 상장을 활성화한다는 목적으로 6개 기업 대표이사를 거래소로 초청해 간담회를 열었다. 거래소 측은 어느 기업들을 초청했는지 공개하지 않았으나, 업계 관계자들에 따르면 원스토어와 에이프로젠 등의 대표이사들이 참석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자리에서 손 이사장은 “거래소는 K-유니콘 등 미래 성장성이 높은 기업의 국내 상장을 지원하기 위해 상장 제도와 심사 프로세스를 개선했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유니콘 기업들에 대한 손 이사장의 러브콜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지난 3월 취임 100일을 맞아 개최한 기자간담회에서는 “해외에 상장할 경우 상장 유지·회계 비용이 국내에 상장할 때와 비교해 최대 10배 많이 들어가며, 소송 리스크도 크다”고 강조했다. 상장 비용이 더 저렴하고 법적 규제의 수위가 낮은 국내 증시에 상장하라는 회유의 메시지였다.

거래소가 K-유니콘 잡기에 혈안이 된 것은 지난 3월 미국 뉴욕 증권거래소에 상장한 쿠팡의 뒤를 이어 두나무와 컬리, 야놀자, 카카오엔터테인먼트 등이 잇달아 미국 상장을 계획 혹은 고려 중이라고 밝혔기 때문이다.

미국을 택했던 쿠팡이 국내 증시에 미친 충격은 대단했다. 거래소는 쿠팡을 의식한 듯 부랴부랴 시가총액이 1조원을 넘기만 하면 다른 재무 요건을 충족하지 않아도 상장 예비심사를 받을 수 있도록 제도를 개편했다.

그러나 이 같은 상장 요건 완화는 해외 주식시장으로 눈을 돌리는 기업들에게 그리 매력적인 요소가 아니다. 한 스타트업 관계자는 “미국에서 상장하면 기업 가치를 국내에서보다 5배 이상 높게 인정받을 수 있는데, 굳이 국내 증시에 상장할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거래소 관계자들은 기업이 국내 증시에 상장할 경우 법률·회계 자문 수수료 등의 비용을 10분의 1로 절약할 수 있다고 말하나, 시가총액을 5~10배로 인정받을 수 있다면 비용은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비상장사의 기업 가치를 산정하는 주체는 기관 투자자와 상장 주관사들이지만, 해당 기업 가치를 승인해주는 것은 거래소와 금융 당국의 몫이다. 상장 예비심사를 청구한 회사와 거래소가 생각하는 기업 가치에 큰 차이가 있다면, 거래소는 심사를 미승인할 수 있다.

이러한 구조로 인해 국내 상장 주관사들은 기업이나 장외 시장 투자자들이 바라보는 기업 가치를 공모가에 온전히 반영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최근에는 금융감독원의 개입으로 기업 가치를 대폭 낮춘 바이오 업체도 있었다. 이 회사는 당초 희망 공모가 범위를 6만6000~8만5000원으로 제시했으나, 금융감독원이 정정 신고서 제출을 요구한 이후 4만5000~5만2000원으로 낮췄다. 이 같은 분위기에서 기업이 국내 상장을 고집할 이유는 없다.

거래소가 더 많은 유니콘의 상장을 유치하려면 기업 가치 산정을 시장 참여자들의 손에 어느 정도 맡겨야 한다. 기업 가치가 다소 높더라도 터무니없는 수준이 아니라면 용인할 필요가 있다. 그런 분위기가 형성돼야만 해외 상장을 추진 중인 유니콘들이 국내로 눈을 돌릴 수 있다. 기업 가치에 대해 좀 더 유연한 잣대를 적용하되 불공정 거래 행위에 대한 관리·감독과 처벌을 강화한다면, 의도적으로 주가를 띄우고 차익을 챙기는 행위로부터 투자자를 보호할 수 있다.

물론 국내 증시 규모는 미국과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작기 때문에 투자 수요 측면에서 한계가 있다. 이 때문에 높은 기업 가치를 용인해줘야 한다는 말이 거래소 입장에서는 과한 제언으로 들릴 수 있겠다. 그러나 부실기업이나 간신히 명맥만 유지하는 수많은 이른바 좀비 기업들을 시장에서 과감히 정리한다면, 투자 수요가 조금이나마 건실한 유니콘 기업들로 이동할 수 있지 않을까.

유니콘 기업들의 ‘탈한국’ 러시는 아직 제대로 시작하지도 않았다. 제2, 제3의 쿠팡이 성공적으로 미국 증시에 안착한다면, 그때는 기업 가치와 성장성이 어느 정도 보장되는 비상장사들이 너도나도 해외 상장에 나설 것이다. 거래소는 지금 중요한 기로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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