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 공산당 100년①..5·4운동부터 문혁까지 우여곡절의 역사

김정률 기자 2021. 6. 22. 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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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INA-POLITICS-ANNIVERSARY © AFP=뉴스1

(서울=뉴스1) 김정률 기자 = 중국 공산당이 7월1일 창당 100주년을 맞는다. 중국 공산당은 1921년 7월 상하이에서 반(反) 제국주의, 반봉건주의 등을 기치로 내걸고 창당했다.

중국 공산당은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의 지원을 받은 장제스가 이끄는 국민당과 연합전선을 펼치며 서구 열강에 맞섰지만 이념적 차이로 결렬, 이후 대립하다가 다시 연합전선을 형성해 다시 일본에 맞서는 등 굴곡진 길을 걸어왔다.

이 과정에서 마오쩌둥과 덩샤오핑이라는 걸출한 지도자가 등장하기도 했다.

현재의 중화인민공화국은 1949년 공산당이 국민당을 중국 본토에서 대만으로 밀어낸 후 건국됐다. 초대 국가주석인 마오쩌둥은 지금까지도 중국 내부에서 추앙받고 있지만 27년간 독재를 이어오면서 중국 밖에서 평가는 엇갈리고 있다.

중국은 현재 몇 남지 않은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이어가는 사회주의 국가지만 개혁·개방을 통해 시장경제를 이루는 등 이른바 사회주의 시장경제 국가 체제를 형성하고 있다.

다음은 중국의 지난 100년간 걸어온 길을 8가지 사건으로 살펴봤다.

◇중국의 3·1 운동…5·4운동과 공산당의 태동

1919년 일본에 침략에 맞서 한국에서 시민불복종 운동이자 한민족 최대 규모의 독립운동인 3·1운동이 일어났다. 이웃한 중국에서도 불과 두 달 후 학생들이 일으킨 항일운동이자 반제국주의 운동인 5·4운동이 발생했다.

5·4운동은 중국의 신민주주의 혁명의 출발점으로 볼 수 있다. 1차 세계대전 후 승전국인 일본은 독일이 산둥성에 가지고 있던 권익을 양보하라고 요구했고, 파리 평화회의에서 이런 요구가 받아들여졌다.

이에 수많은 학생들은 파리평화회의 결과에 격분하며 모여들었다.

중앙 정부를 무시하고 사실상 각 성(省)을 장악한 군벌들은 이들을 체포하는 등 탄압을 가했지만 오히려 사태는 점점 더 격화됐다. 이 과정에서 공산주의인터내셔설(코민테른)은 중국에 밀사를 파견해 리다자오와 천두시우 등 초기 공산주의 인물들이 공산당이 결성하도록 했다.

6일 (현지시간) 베이징 톈안먼에 걸린 마오쩌둥의 초상화 아래에 코로나19 감염을 막기 위해 마스크를 쓴 경찰이 경비를 하고 있다. © AFP=뉴스1 © News1 우동명 기자

◇대약진 운동, 인류역사상 최악의 기황

중국 공산당은 국민당을 대만으로 밀어냈지만 당시 지도자들은 그전까지 국가를 운영한 경험이 없었다. 이에 공산주의 사상만 앞세운 무리한 정책 추진을 했다. 특히 마오쩌둥이라는 지도자를 견제할 수단이 없던 공산당은 대약진 운동를 펼치면서 사상 최악의 기근을 겪었다.

대약진이라는 말은 공산당 기관지인 인민일보가 1957년 11월 13일자 사론인 '전민을 발동해 40조 강요를 토론하고 농업생산의 새로운 고조를 일으키자'에서 비롯됐다.

공산당은 대약진이라는 구호 아래 7년에 영국을, 8년 혹은 10년 안에 미국을 따라 잡는다는 목표를 설정하고 농공업 대증산 정책을 추진했다.

하지만 농촌의 현실을 무시한 무리한 집단 농장화나 농촌에서 철강 생산 등을 진행시킨 결과 오히려 농촌에서는 노동력 차출로 인한 생산력 급감이, 도시에서는 필수품 공급 부족이라는 최악의 사태에 직면했다.

1958년부터 1960년대 초반까지 3년에 불과한 시간 동안 수천만 명의 아사자가 발생했다. 결국 대약진 운동의 실패를 인정한 마오쩌둥 국가 주석은 사임했다.

◇문화대혁명…10년간 중국은 다시 혼란으로 마오쩌둥은 복귀

문화대혁명은 대약진 운동의 실패 후 중국 내부 권력 투쟁의 산물로 볼 수 있다

마오쩌둥은 표면적으로 소련의 잘못된 수정주의가 중국에서 재현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했지만 사실은 자신의 권력이 덩샤오핑 등에게 넘어가려하자 반대파 제거를 위해 극좌적인 계급 투쟁을 벌였다는 게 국내외의 시각이다.

1962년 9월 중앙위원회 전체회의에서 마오쩌둥은 계급투쟁을 강조했고, 전국 각지에서는 청소년으로 구성된 '홍위병'이 등장했다.

이들은 4개의 낡은 것 Δ낡은 사상 Δ낡은 문화 Δ낡은 풍속 Δ낡은 관습을 타파하겠다며 각지에서 문화재와 예술품 등을 파괴했고, 반혁명 인사로 지목된 사람은 자아비판을 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지식인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관직에서 물러나야만 했다.

문화대혁명은 1967년 마오쩌둥이 인민해방군에 문화대혁명에 개입하고 초기 홍위병들을 추방하면서 겨우 진정 국면으로 들어갔다.

문화대혁명은 마오쩌둥이 1969년 전국인민대표자회의에서 다시 지위를 확립하고 후계자로 린뱌오를 지목하면서 끝을 향했다. 하지만 린바오가 의문의 비행기 추락사를 당하면서 후계자는 화궈펑이 됐다.

이후 1976년 마오쩌둥이 사망하면서 마오쩌둥의 측근이었던 이른바 4인방이 화궈펑에 의해 축출됐고, 문화대혁명은 종지부를 찍었다.

➁에서 계속

jrkim@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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