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주하면 '을'"..공공지원 민간임대의 '배신'

전태훤 선임기자 2021. 6. 22. 0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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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놓고 세입자 취급해 입주자 무시
입주민 의견 빠진 의사 결정
주거차별 위협하는 불안한 주거복지

“입주하는 순간 바로 ‘을'이 되는 거죠. 정부 믿고 들어왔는데 실망만 한가득입니다.”

무주택자와 주거취약 계층의 주거복지를 약속하고 문재인 정부가 공급 중인 ‘공공지원 민간임대주택'이 애초 취지를 살리지 못하고 입주자들의 주거 불만과 갈등을 키우고 있다.

세대 전체가 임차인이란 이유로 위탁 운영회사와 관리 업체로부터 홀대를 받거나 단지 운영과 관련한 의사 결정에서 배제돼 입주민들의 원성도 커지고 있다.

임대료가 비싸고 주거취약층 배려가 부족하다는 전 정부의 기업형 임대주택(뉴스테이)을 사실상 폐지하고 공공성을 강화해 내놓은 것이 공공지원 민간임대인 만큼, 공급 취지를 살리려면 입주민 권리를 위한 세심한 관리 규정 정비가 필요해 보인다.

◇“누구를 위한 관리규정인가”…입주민 빠진 의사결정

지난해 7월 완공돼 올해 입주 만 1년을 맞는 서울의 한 공공지원 민간임대 단지는 최근 용역업체 선정과 관련해 입주자들과 단지 위탁관리회사가 갈등을 빚고 있다.

입주자의 의견이 배제된 채 위탁관리사 측 평가위원들만 심사해 경비업체와 환경미화 업체가 선정된 것을 두고 입주민들의 불만이 터져 나온 것이다.

이 단지 한 입주자는 “원래 공동주택 관리 규약에는 용역업체를 선정할 때 입주자 평가도 포함하게 돼 있다”며 “그러나 실제 이뤄진 평가에선 입주민 평가는 뺀 채 단지 운영 주체 쪽의 평가만 반영됐다”고 말했다.

공동주택 관리규약이 제시한 용역업체평가서는 입주민 평가위원의 평가점수를 포함하게 돼 있으나(왼쪽 사진) 서울의 한 공공지원 민간임대 단지에서 작성된 평가서엔 입주민 평가가 빠진 채 평가가 이뤄졌다. /입주자 제공

그는 “1년간 살면서 경비업체와 청소업체에 대한 입주민 불만이 많았었다”며 “그런데 용역업체 재계약 과정에서 입주자 의견이 반영되지 않은 채 위탁운영사 쪽 의견만으로 기존 업체를 재선정하기로 해 주민 반대가 컸다”고 했다.

그는 “이의 신청을 하는 과정에서도 관리회사 측으로부터 절차상 문제가 있다는 지적을 들어 입주자들이 개별적으로 다시 이의 신청을 하고 있지만 얼마나 (이의 신청이) 이뤄졌는지 공개되지 않아 불투명하다”고 말했다.

◇ 입주자가 ‘을’이 되는 불편한 진실

공동주택은 입주자가 주인인 곳이다. 하지만 공공지원 민간임대에선 입주자가 ‘을’이 되는 불편한 진실이 숨겨져 있다. 소유권이 없기 때문이다.

용역업체 선정에서 임차인의 의사가 반영되지 않은 것도 대주주가 한국토지주택공사(LH)와 같은 공공기관인 위탁관리부동산투자회사가 소유권을 갖고 있어서다.

단지 운영 관리를 책임지는 위탁운영사의 경우 수익을 내야 하는 기업이다 보니 수익률 관리에 소홀할 수 없다. 용역업체 선정 등 단지 관리와 관련해서도 입주자 평가가 반드시 필요한 일반 분양아파트와 달라 공급자 입맛에 맞는 곳을 고를 수 있는 구조가 된다.

서울의 한 공공지원 민간임대 단지. /입주자 제공

입주민을 대하는 관리직원들의 태도도 일반 분양아파트와는 사뭇 다르다고 입주자들은 말한다. 입주자 김모씨는 “일반 아파트에선 세를 살아도 함부로 대우받지 않았는데, 여긴 모두가 임차인이다 보니 주차나 환경미화 관리도 소홀하다고 느끼게 되는 경우가 잦다”고 토로했다.

이 아파트에 살고 있는 최모씨는 “부모님께서 자녀 얼굴 보겠다고 왔는데 관리 직원으로부터 ‘코로나가 한창인데 이런 시국에 뭐하러 자녀 집을 찾아오느냐'는 핀잔을 듣기도 했다”며 “일반 아파트에선 입주민이 갑질을 한다고 하지만, 여기서는 반대 상황이 벌어지기도 한다”고 했다.

입주자들은 이런 문제가 비단 이곳에만 국한되지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또 다른 입주자 박모씨는 “아직 입주 단지가 많지 않아 이런 문제가 크게 이슈화되지 않았지, 앞으로 계속 터질 문제들”이라며 “입주자 목소리를 반영할 수 있는 명문화된 관리 규약이 마련돼야 한다”고 말했다.

◇ 우려되는 또 하나의 주거차별

공공지원 민간임대의 전신은 뉴스테이다. 뉴스테이가 민간 사업자에게 과도한 특혜를 주면서도 높은 임대료로 운용된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자 현 정부가 문제점을 보완해 내놓은 민간임대 공급의 한 축이다.

공공지원 민간임대가 주거취약층을 위한 주거복지라는 기치를 내걸고 있지만, 입주자가 임차인이란 이유로 무시되는 사례가 잇따른다면 아무리 좋은 임대단지라도 주거복지가 아니라 또 다른 주거차별이 될 수 있다.

한 사립대 부동산학과 교수는 “정부 주도로 이뤄진 민간임대는 얼마나 공급이 되는지에 못지않게 어떻게 운영되는가가 중요할 수 있다”며 “주거취약층을 위하려던 주거복지가 자칫 이들을 두 번 죽이는 주거차별 부작용으로 나타날 수 있다”고 지적했다.

황종규 명지대 부동산학과 교수는 “소유권이 없는 임차인으로만 구성된 임대단지는 입주자가 용역업체 선정이나 인력 채용에 관여할 수 있는 일반 아파트와는 관리 구조가 다르다”며 “개별 단지마다 임차인 대표가 단지 운영관리에 참여할 수 있게 명문 규약을 둔다면 임차인 보호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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