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남북] 기립 박수 초심자를 위한 가이드
불편하면 동참할 필요 없어… 감흥에 솔직하게 반응해야
어느 뮤지컬이 폐막하고 나서 이메일을 받았다. 보도 자료 제목이 ‘전회 기립 박수 이끌어내며 성료’였다. 보도할 만한 가치는 없었다. 요즘 국내 뮤지컬 공연장에서 전회 기립 박수는 흔한 일이기 때문이다.
10년 만에 공연을 다시 맡았다. 올 들어 연극·무용·뮤지컬·국악 등 70편쯤 만났는데, 뮤지컬을 볼 때마다 그렇게 이상한 풍경을 목격했다. 공연이 끝나고 커튼콜(출연진이 모두 나와 인사한다)을 하면 으레 앞줄부터 기립 박수의 파도가 시작됐다. 도미노 효과처럼 뒷줄 관객도 엉덩이를 일으켰고, 앞이 보이질 않으니 엉거주춤 따라 일어서는 경우도 있었다.
기립 박수란 ‘감동 받은 관객이 몸으로 보내는 찬사’라고 나는 생각한다. 만족도를 측정하는 저울이 있다면 최고 눈금에 해당할 것이다. 관객은 저마다 경험과 기대가 다를 테니 같은 공연을 봐도 감상은 최고점부터 최하점까지 다양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객석 풍경만 보면 한국에서 뮤지컬은 별 다섯 개 만점짜리가 수두룩하다. “오죽했으면 기립 박수도 못 받느냐” 할 정도다.
작품은 창작자의 것이자 소비자의 것이다. 누가 누구에게 기립 박수를 하라 하지 마라 강요할 권리는 없다. 다만 ‘기립 박수 인플레이션’은 살펴볼 만한 현상이다. ‘너무’ ‘완전(히)’ ‘가장’ 등 강한 부사를 점점 더 많이 사용하는 ‘언어 인플레이션’과 무관하지 않다. 처음에는 ‘참기름집’으로 쓰면 충분하던 간판도 이젠 ‘진짜순참기름집’으로도 모자라 ’100%원조진짜순참기름집'으로 부풀려졌다. 불안이 말에 거품을 부르고 가치 하락을 자초한 셈이다.
흔해진 기립 박수를 보면서 계란을 생각했다. 계란 품질은 1+등급부터 3등급까지 있는데 1+등급은 얼마나 될까? 축산물품질평가원이 판정한 어느 해 통계를 보니 93.2%에 달했다. 최고 등급 비율이 이렇게 높다면 그 기준에 거품이 있는 것 아닐까.
이 글은 기립 박수 초심자를 위한 가이드다. 공연장에 가기 전부터 기립 박수를 할 준비가 돼 있는 관객이라면 읽기에 불편할 수 있다. 역지사지로 삼기를 바란다. 왜 기립 박수가 나오는지 의아했던 관객, 억지춘향으로 일어나 박수를 보태며 거북했던 관객, 기립 박수 없는 공연의 가치가 더 높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관객에게는 쓸모가 있을 것이다.
먼저 공연장은 직장이 아니다. 당신은 그 시·공간에 대한 비용을 이미 지불했다. 감정 노동 하지 말고 느낀 만큼만 표현하면 된다. 두세 시간 동안 수고한 배우들을 격려하고 싶다면 앉은 채로 손뼉을 쳐도 모자람이 없다. 일부 마니아 관객이 열광적으로 반응하더라도 휩쓸리지 마라. 세상에는 좋은 뮤지컬과 더 좋은 뮤지컬, 더 더 좋은 뮤지컬, 더 더 더 좋은 뮤지컬이 있기 마련이고 ‘공중제비 후 기립 박수’를 발명하지 않는 한 기립 박수는 만족감의 최대 표현이다.
아무한테나 사랑한다고 하면 그 사랑은 의심받을 수밖에 없다. 기립 박수도 매한가지다. 흥청망청 쓰지 말고 아꼈다가 그만한 자격이 있는 작품을 경험할 때 보내야 가치가 훼손되지 않는다. 맹목적 기립 박수는 그 공연을 만든 창작자나 제작자, 배우에게도 바람직하지 않다. 요만큼만 해도 별 다섯 개를 받는데 더 고민하고 노력할 이유가 뭐란 말인가.
혈액 순환에 좋으라고 기립박수를 쳤다면 논외다. 어떤 뮤지컬이 기립 박수를 받고 끝날 때 ‘내가 돈을 낭비하진 않았구나’ 안도하며 동참하는 관객도 있다. 마음을 속이는 기립 박수의 다른 부류다. 다시 말하지만 당신은 고장 난 저울이 아니다. 감흥이 크다면 마음을 담아 기립 박수를 보내고 감흥이 일지 않는다면 자리를 박차고 나가라. 그래도 괜찮다. 기립 박수에 참여하지 않는다고 누가 눈총을 준다면 그를 가엾게 여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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