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천의 자연과 문화] [631] 필리포 실베스트리

최재천 교수 2021. 6. 22. 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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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충분류학에서 가장 원시적인 곤충목으로 분류되는 낫발이(Protura)라는 곤충이 있다. 눈도 없고 앞발을 더듬이처럼 사용하느라 특이하게 네 발로 걷는다. 주로 흙 속에 살며 몸길이가 그저 2㎜밖에 안 되는 아주 작은 곤충이다. 오늘은 바로 이 낫발이를 최초로 발견한 이탈리아 곤충학자 필리포 실베스트리(Filippo Silvestri·1873~1949)가 태어난 날이다.

생전의 이탈리아 곤충학자 필리포 실베스트리/zobodat.at

그는 낫발이목과 더불어 민벌레목(Zoraptera)도 세계 최초로 발견하고 기재했다. 민벌레는 열대 숲의 썩어가는 나무 속에서 사는, 역시 2㎜ 남짓의 작은 곤충이다. 민벌레는 1913년 처음 기재된 이래 100년이 넘도록 아홉 종의 화석을 포함해 겨우 50종밖에 발견되지 않은 매우 희귀한 곤충이다. 나는 바로 이 민벌레의 진화를 연구해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84년 하버드대 윌슨(Edward Wilson) 교수로부터 민벌레 연구를 허락받은 순간 나는 곧바로 이 분야 세계 최고 전문가가 되었다. 당시에는 세계에서 민벌레를 연구하는 학자가 한 명도 없었기 때문이다. 윌슨 교수 연구실의 연구자들 모두 개미를 연구할 때 나는 흰개미의 진화를 밝히겠다며 그 사촌 격인 민벌레를 연구하겠노라 고집을 부렸다. 아쉽게도 흰개미 진화에는 크게 기여하지 못했지만 나는 대신 다윈의 성선택(sexual selection) 분야의 전문가가 되었다.

2018년 미국에서 출간된 최신 곤충학 책에 나는 편집장 요청으로 민벌레 부문 필자로 참여했다. 남들이 하지 않는 분야를 연구했더니 30년 넘도록 세계 제일의 전문가 자리를 고수하고 있다. 이른바 잘나가는 분야에 줄을 서야만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나는 학생들에게 남들이 하지 않는 분야를 일부러 고를 것까진 없지만 자신이 선택한 분야가 당장 인기가 없더라도 절대 기죽을 것 없다고 일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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