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완규의 책읽기 세상읽기] (62) '역사 앞에서' - 전쟁의 기록
그는 광복 후 좌우익 갈등이 커지는 것을 심각한 문제로 여겼다. 1945년 12월19일 임시정부 개선 환영행진을 보고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거리에는 꽃전차가 화려하고 광복군과 소년군(少年軍)의 행진이 장엄하고 유량한 나팔소리에 울려나오는 애국가의 멜로디가 … 눈물겹도록 기쁜 현상이지만 한편으론 인민공화국 측과 한국민주당 측이 서로를 민족반역자라 욕하고 죽일놈 살릴놈 하는 격렬한 삐라를 돌리는 것이 마음 아픈 노릇이다. 이 우매한 정치광(政治狂)들과 탐권배(貪權輩)들이 선량한 동포들을 항쟁의 구렁으로 몰아넣고 조국의 광복에 일말의 암운(暗雲)을 끼치게 한다면 어찌할 것인가.”
그는 학자적 양심을 지키면서 중도를 지향했다. 당시 정치 상황에서 좌익과 우익 모두를 적으로 돌릴 수 있는 위험한 선택이지만 개의치 않았다.
“38도 이북에선 우익 학생의 주동으로 학원에 불상사가 접종(接踵·잇따라) 발생하여 공부를 폐하게 된 곳도 많다는데 이남에선 또 좌익 학생들의 선동으로 이처럼 학원이 불안하니 이래저래 조선 학생들은 모두 허청거리고 아까운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
나아가 나라가 무질서, 무규율로 혼란과 불안에 빠져드는 것을 우려한다. 사람들이 전차에 서로 먼저 타려고 필사적으로 덤비는 모습을 보면서 자기염오(自己厭惡)를 느끼기도 한다.
“차장이 매어달리면 위태하니 다음 차를 타라고 아우성을 질러도 막무가내하다. 다음 차가 곧 온다고 달래어도 들은 체 만 체다. 지도자에게 오랫동안 속아왔기 때문에 스스로의 문제를 스스로의 판단에 의하여 해결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마음의 무장이 있어서 차장의 말을 듣지 않는 것이거니 하고 생각하면 슬픈 일이다.”
그는 “이번 차에 꼭 타지 않으면 무슨 큰 낭패라도 있을 듯한, 모두 그러한 표정”이라며 나라의 앞날을 걱정한다.
“사소한 일에 심각한 표정을 갖는 민족은 지극히 불행한 환경 속에 살아왔기 때문일 것이고, 또 그러한 마음가짐 자체가 불행한 현재의 표상이며, 또 앞으로 불행을 빚어내는 기틀이 될 것이다.”
“이 어려운 시절 막다른 판국에 있어서 국가의 공식 발표를 믿지 못하는 내 마음이 슬펐다. 나라고 개인이고 간에 언제나 바른말을 해야 할 것이고 일시의 편익을 위하여 허위의 길을 밟는 것은 이 곧 자멸의 길과 통하는 것임을 새삼스레 절실하게 느끼었다.”
피난길에 오르지 못한 그는 “우리는 좋든 싫든 하룻밤 사이에 대한민국 아닌 딴 나라 백성이 되고 만 것”이라며 “세상이 갑자기 뒤엎이고 보니 우리처럼 행동이 굼뜬 측들은 새 나라 백성이 되기가 무척 힘들고 … 그때그때 처신하기에 난처한 경우가 한두가지가 아니다”라고 했다. 집 대문간에 달기 위해 북한 국기를 그릴 때는 “8·15 때 비로소 마음 놓고 태극기를 그리던 감격이 어제런 듯 새롭건만 오늘은 울부짖는 포화 아래서 또 한 개 우리나라의 국기를 그려야 하다니”라고 애통해했다.
그후 미군이 참전하면서 서울 곳곳에 대규모 폭격이 시작됐다.
“이러한 맹폭이 있음에도 미제에 대한 일반시민의 적개심이 별로이 불타오르는 것 같지 않고, 더러는 시민의 머리에 폭탄을 퍼부음이나 다름없는 이 폭격에 되레 일종의 희망을 품는 것 같아 보이니 이상한 일이다.”
서울이 수복된 뒤 온갖 심사를 벌여 애먼 사람들까지 처단하는 현실을 안타까워 한다. 그 결과 인재가 부족한 나라에서 문화인과 기술자들까지 북에 빼앗기게 됐다는 것이다. 이들을 붙잡기는커녕 편견을 고집해 등을 떠밀다시피 한 ‘정치의 빈곤’을 질타한다. “그들이 모두 다 볼셰비끼였다면 또 모를 일이지만 중립적인 입장을 지키던 사람들 또는 양심적인 이상주의자들이 죄다 가버렸음을 생각하면 우리는 깊이 반성하는 바 있어야 할 것”이라고 했다.
김성칠은 일기에서 전쟁과 인간의 모습을 생생하게 그려냈다. 당시 좌도 우도 아닌 중도의 길이 얼마나 험난했는지 알 수 있다. 그는 참혹한 역사를 견뎌내면서도 어느 편에 서는 게 유리한지가 아니라 어느 편이 옳은지를 따진다. 독립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나라가 바로 서기를 염원했기 때문이다. 그는 곤궁한 상황에 처해서도 나라의 미래를 생각했다. 지금 이 시대는 어떤가. 여전히 부끄러움을 모르고 편 가르기에 골몰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김성칠의 일기에 담긴 경구들을 뼛속 깊이 새겨야 할 때다.
박완규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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