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적]'심리 지배' 범죄

차준철 논설위원 2021. 6. 21. 2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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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너는 내가 제일 잘 알아” “나는 무조건 네 편이니 내 말만 들어” “이게 다 너를 위한 거야”…. 일상생활 속에 흔한 말 같지만 무심코 넘겨서는 안 된다. ‘가스라이팅’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는 위험한 언어들이다. 가스라이팅이란 타인의 심리를 교묘히 조작해 자존감을 낮추고 정신을 황폐하게 만들어 통제·지배하는 것을 말한다. 영국 작가 패트릭 해밀턴의 희곡 ‘가스라이트’에서 유래했다. 보석을 훔치려고 가스등을 흐릿하게 만든 남편이 이를 의아히 여기는 아내에게 과민반응이라는 핀잔을 반복하며 망상으로 몰아가는 이야기다. 아내는 판단력을 잃고 남편 말에 의존하는 존재로 전락한다.

‘그루밍’은 가해자가 피해자와 친밀한 관계를 형성해 신뢰를 쌓은 뒤 행하는 성적 가해를 가리킨다. 주로 그루밍 성범죄라는 말로 쓰인다. 아동·청소년 피해가 많다. 전문가들은 그루밍 성범죄가 피해자의 환심과 신뢰를 얻은 뒤 고립시켜 의존성을 키우고, 성적인 관계를 유도한 뒤 협박과 회유에 나서는 방식으로 이뤄진다고 분석한다.

가스라이팅이 위력을 앞세워 상대를 억압하는 것이라면, 그루밍은 친밀함을 가장한다는 것이 다른 점이다. 하지만 둘 다 피해자를 상대로 정서적 학대를 지속해 가해자만을 의존하게 만드는 일종의 세뇌라는 점은 같다. 국립국어원이 지난해 가스라이팅의 우리말 순화어로 제시한 ‘심리 지배’라는 말이 잘 들어맞는다. 또 피해자들이 학대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해 피해기간이 길고 적발과 처벌이 어려운 점도 비슷하다.

동갑내기 친구를 오피스텔로 납치한 뒤 폭행과 학대 끝에 숨지게 한 20대 2명이 최근 구속됐다. 경찰은 숨진 피해자가 “심리적으로 강압된 상황에 있었다”고 밝혔다. 경찰 조사 결과 피해자는 두 달 넘게 감금 상태에 있으면서도 도망을 시도하지 않았고 아무 저항 없이 피의자들과 동행해 외출한 것으로 밝혀졌다. 휴대전화 개통, 소액 결제도 시키는 대로 한 것으로 조사됐다. ‘심리 지배’ 범죄가 살인에까지 이른 것이라 참담하다. 가스라이팅 또는 그루밍은 연인·친구·가족 사이에서도 일어날 수 있고, 친할수록 발생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누구나 당할 수 있다는 경각심을 키워야겠다.

차준철 논설위원 cheol@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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