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인한의 일본 탐구 5] '재계 총리' 게이단렌 회장의 리더십 | 보다 나은 사회·디지털 전환 등 일본의 변혁 주도
‘재계 총리’, 1970~90년대 일본 경제의 전성기에 게이단렌(經團連·일본경제단체연합회) 회장에게 붙여진 별명이다. 정경 일체 국가인 일본에서 그 존재감이 국가 정상과 맞먹는다는 의미에서 재계 총리로 불렸다. 총리 옹립에 영향력을 행사하거나 정치 헌금을 둘러싸고 집권 여당과 정면으로 맞선 회장도 있었다. 2000년대 들어 침체기도 있었으나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위기 속에 게이단렌의 사회적 존재감이 다시 커지는 분위기다.
15대 게이단렌 회장 6월 1일 취임
코로나19와 4차 산업 시대의 전환기를 맞아 게이단렌이 일본의 혁신을 주도하고 있다. 1946년 게이단렌 설립 이후 여성 기업인을 부회장으로 처음 임명한 것도 그런 움직임의 하나다. 6월 1일 정기총회에서 도쿠라 마사카즈(十倉雅和·71) 스미토모화학 회장이 15대 게이단렌 회장으로 취임했다. 그는 난바 도모코 디엔에이(DeNA) 회장 등 6명을 부회장으로 임명했다. 게이단렌 75년 역사상 여성 부회장은 난바가 첫 사례다.
게이단렌은 일본 사회의 당면 현안에 대해서도 목소리를 키우고 있다. 지난해 게이단렌은 포스트 코로나 시대 일본 경제의 미래를 담은 제언을 발표했다. 당시 나카니시 히로아키 회장은 일본 정부의 느린 코로나 대응을 비판하며 ‘디지털 혁명’을 주창했다. 그는 디지털 사회로의 변혁을 담은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DX·디지털 전환)’ 전략을 공개했다. DX는 디지털 기술과 데이터를 활용해 사회·산업·생활의 존재 형태를 근본적으로 바꾸자는 것. 종이 서류와 도장, 팩스 같은 아날로그 시스템으로는 국가 경쟁력이 더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위기의식에서다.
나카니시는 “코로나 위기 국면은 일본이 변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며 “기반 산업이 튼튼한 일본 경제는 디지털 혁명으로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자신했다. 그는 “원격 근무, 코로나 앱 활용에서 정부 부문이 가장 느리다”고 비판한 뒤 “총리가 리더십을 발휘해 디지털 혁명에 과감하게 나서라”고 촉구했다. 또 “10~15년 단위로 커다란 변화를 해온 일본 산업계에도 대격변이 일어날 것”으로 전망했다.
대담한 ‘디지털 혁명’을 재촉한 게이단렌의 제언은 아날로그식 일본 사회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정부가 지난해 하반기 발표한 ‘일본 경제 기본방침 2020’에 디지털화 대책이 최우선 정책 과제로 반영된 배경이기도 하다. 정부는 재계 제언을 수용, ‘디지털 뉴딜’ 용어를 도입하고 일본의 디지털화를 서두르고 있다.
정부보다 앞서가는 ‘게이단렌 회장 비전’
게이단렌은 무역 자유화, 자유 경쟁 촉진, 에너지 및 환경 문제 대응, 민간 경제 외교, 임금 협상과 안정된 노사관계 구축 등 일본의 자유주의 경제체제 유지와 활성화에 힘을 쏟아왔다. 2002년부터 2006년까지 10대 회장을 지낸 오쿠다 히로시 도요타자동차 전 회장은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가 주도한 경제재정자문회의 민간위원을 처음 맡아 정부의 주요 회의에 게이단렌 회장이 참여하는 전통을 세웠다.
이와 함께, 일본이 가야 할 방향을 담은 ‘게이단렌 회장 비전’을 주기적으로 제시해 일본 사회의 변화를 이끌어 왔다. 지금까지 나온 게이단렌 회장 비전은 ‘활력과 매력이 넘치는 일본을 향해(2003년)’ ‘희망의 나라, 일본(2007년)’ ‘민간 주도의 산업력 강화를 향한 선라이즈 리포트(2010년)’ ‘풍요롭고 활력 있는 일본의 재생(2015년)’ 등이다.
일본 경제를 책임지는 게이단렌 회장의 헌신적인 직무 수행도 주목할 만하다. 지병으로 임기를 1년여 남겨두고 지난 5월 퇴임한 나카니시는 병실에서 1년가량이나 업무를 볼 정도로 게이단렌 회장 역할에 최선을 다했다. 그는 와병 기간 중 병실에서 기자회견을 자주 가졌다. 정부 경제재정자문회의에도 온라인으로 참석했다.
나카니시 회장은 4차 산업 전환기를 맞아 ‘지속 가능한 자본주의 확립’을 추진했다. 에너지 정책과 디지털 사회 실현을 향한 제안에 적극적이었다. 그는 “탈탄소 사회를 위해 정부와 재계가 손잡고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온실가스를 대폭 줄이려면 전력이나 철강, 자동차, 전자기기 등 관련 업계가 하나가 되어 대응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신임 게이단렌 회장의 3대 키워드
15대 게이단렌 회장은 일본 경제의 회복과 탈탄소 사회로 가는 책임을 떠안게 됐다. 게이단렌 내부 전통인 제조 대기업 대표이면서 환경 기술과 관련 깊은 스미토모화학 경영자가 게이단렌의 새 사령탑을 맡게 된 배경이다. 도쿠라 회장은 취임 이후 게이단렌의 향후 운영 방침을 밝혔다. 그는 ‘Society 5.0 for SDGs’와 지속 가능한 자본주의 노선을 계승하겠다고 강조했다.
도쿠라 회장은 취임 회견에서 글로벌 자본주의 심화에 따른 빈부 격차 확대와 지구 온난화로 인한 생태계 파괴 등 일본 경제가 맞닥뜨린 과제에 대응하기 위한 게이단렌 차원의 3대 키워드를 제시했다. 첫째, ‘사회성’이다. 빈부 격차 확대 등 시장경제의 부작용을 해결하기 위해 경제에 ‘사회성’의 접목을 강조했다. 자유롭고 활발한 경쟁과 혁신 창출 등 시장 경제의 장점을 살리면서 부작용을 해결하자는 취지다. 사회로부터 분리된 경제가 아닌 ‘보다 나은 사회’의 실현을 위한 시장 경제를 뜻한다.
두 번째가 국제 협조다. 미·중 마찰 등 지정학적 리스크 확대로 기업 활동이 커다란 영향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개별 국가의 힘만으론 대응하기 어려운 지구 온난화, 팬데믹(pandemic․감염병 대유행), 생태계 파괴 등의 난제를 해결하기 위해 국제적 대응과 협조에 적극 나서기로 했다.
셋째, 디지털과 친환경 중심 정책이다. 게이단렌이 일본 정부와 협력해 디지털화와 친환경화를 주도하겠다는 것. 이를 위해 ‘경제단체연합회 DX 설계 프로젝트’를 강화하고, 게이단렌이 추진해온 ‘저탄소 사회 실행 계획’을 ‘탄소 중립 행동 계획’으로 수정했다.
도쿠라 회장은 6월 중순 NHK 인터뷰에서 “게이단렌 회장 취임은 매우 어려운 결단이었다” 며 “의(義)를 보고 행하지 않는 건 용기가 없는 것이라고 판단했다”고 중책을 맡은 심경을 털어놨다. 오는 7월 하순 도쿄올림픽의 성공 개최, 코로나 방역, 디지털 사회 전환, 경제 회복 등 난제가 산적한 일본 사회에서 신임 게이단렌 회장의 리더십에 거는 기대가 크다.
plus point
영향력 막강 日 게이단렌 대표 기업 1461개로 구성
게이단렌의 영향력은 막강하다. 게이단렌은 정치자금으로 보수 자민당의 장기 집권을 후원해온 세력이다. 1980년대 후반 버블(거품) 경제 당시 “재계가 정부를 뒤흔드는 구조”라는 평가가 나올 정도로 총리 교체에 깊숙이 관여했다. 일본의 ‘자유주의 경제체제’를 지키는 중심축이 관료 엘리트와 재계 리더들이다.
게이단렌의 공식 명칭은 ‘사단법인 일본경제단체연합회’이다. 제2차 세계대전 패전 다음 해인 1946년 8월 설립됐다. 연합국의 배상금 요구와 협상에 대비해 국내외 여론을 조성, 국익 보호에 나서 달라는 정부 측 요청을 경제 단체들이 수용해 탄생했다. 게이단렌은 일본 대표 기업 1461개와 제조 및 서비스업 등 주요 업종별 단체 109개, 지역별 경제 단체 47개로 구성돼 있다. 정관 3조에 “종합 경제 단체로서 기업을 떠받치는 개인과 지역의 활력을 끌어내 일본 경제의 자율적인 발전과 국민 생활 향상에 기여한다”고 설립 목적이 명시돼 있다.
제1대 이시카와 이치로(닛산화학공업 사장)를 시작으로 도쿠라 마사카즈(스미토모화학 회장)까지 15명의 게이단렌 회장이 탄생했다. 도시바(도쿄시바우라전기), 신일본제철, 도요타자동차, 캐논, 스미토모화학, 도레이, 히타치제작소 등 제조 대기업의 경영자들이 게이단렌 회장을 주로 맡아왔다. 비제조업체 출신은 관료로 게이단렌 창설에 기여한 3대 우에무라 코고로와 도쿄전력 회장이었던 7대 히라이와 가이시 등 2명뿐이다. 올 6월 출범한 게이단렌 현 집행부는 회장 1명, 사무총장 1명, 이사 26명, 감사 2명으로 구성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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