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희진의 융합] 영어, 영어 교육을 생각한다

한겨레 2021. 6. 21. 1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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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진의 융합]정희진의 융합 _26
이십대 청년이 ‘정희진의 융합’을 먼저 읽고 그리다. 김우석

플랫폼 자본주의 체제에서 공교육 붕괴
영어 교육의 의미도 급변

융합은 대안을 향한 실천이자 탈식민
외국어 자체는 지식 아닌 도구일 뿐

공부·전문가의 기준 다양화해야
영어에 대한 세간의 요구는 이중적

자기만의 콘텐츠가 우선
그다음은 통역자의 몫

교육부가 지난 5월2일 발표한 ‘2020년 국가수준 학업성취도 평가 결과’는 예상대로였다. 코로나의 영향으로 학습 결손과 학력 저하, 특히 영어 과목에서의 격차가 컸다. 여론은 우려한다. 하지만 나는 이러한 현실이 정말 ‘문제’일까라는 생각이 든다. 이미 오래전부터 대한민국의 학생들은 학교생활이 즐겁지 않았다. 들러리 취급받고 폭력에 시달렸다. 지금은 공부를 열심히 해도 취업으로 연결되지 않는다.

고교 영어 교사인 내 친구는 동료들 중 두 가지 타입이 있다고 말한다. 자신이 ‘월급충’이라며 괴로워하는 경우와 현실에 적응하는 사람. 영문과 교수들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다. 어릴 적 해외 생활 경험 등으로 교사보다 발음이 좋은 학생도 있고, 미디어의 발달로 영어를 배우는 경로도 다양해졌다.

한국 현대사에서 영어와 관련된 우울하다 못해 괴이한 이야기는 끝이 없다. 오로지 영어 능력 하나만으로 대통령이 된 인물도 있었고(최규하 전 대통령), 몇 년 전, 서울 강남 일부 학부모들 사이에서는 ‘버터 발음’을 위해 자녀의 혀를 절단하는 수술이 유행했다.

이런 이야기들은 뒤로하자. 이제 우리가 직면해야 할 현실은 군대와 학교 붕괴다. 이를 인식하지 못하고 공교육의 공정성 강화를 외치는 것이 무슨 소용인가. 아니, 가능한가? ‘진보 교육감’ 흔들기 좋은 진부한 구실일 뿐이다. 지금 군대와 학교는 사병이나 학생을 위한 제도가 아니다. 장교와 교사의 생계를 위한 장치다. 그런 의미에서, 지나친 경우만 아니라면 사교육 시장에 대한 비난도 적절치 못하다고 생각한다. 사교육으로 생계를 이어가는 대졸자가 얼마나 많은가.

나는 교육 불평등을 우려하는 사고방식의 전제를 묻고 싶다. 지금 한국 사회의 문제가 ‘제3세계’처럼 교육 기회의 부족 때문인가. 오히려 산업 구조에 안 맞는 고학력자의 범람이 ‘문제’ 아닌가? 해외 취업론도 이러한 상황에서 나왔다. 학교 공부를 잘하면 취업이 되는가? 집을 구할 수 있는가? 소통 가능한 시민이 되는가? 금수저로 태어나도 본인의 피나는 노력이 동반되어야 한다. 나머지는 ‘잉여’인 세상이다.

교육 조건이 평등해진다 해도, 모든 학생이 공부를 잘할 수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 공부의 기준이 다양한 사회만이 대안이다. ‘사다리’가 하나인 것도 문제지만, 그 사다리를 우리 스스로 절대화하는 것이 더 큰 문제다. 비교적 평등한 사회에서도 학력 격차는 있기 마련이다. 그것이 인권, 취업, 인격에 대한 불평등과 모욕으로 연결되지 않는 문화 만들기가 훨씬 중요하다.

주지하다시피, 학교와 군대는 근대 초기 산업자본주의 시대에 노동자를 대량으로 훈련시키고 그들을 ‘국민’으로 만드는 핵심 기관이었다. 그러나 이 시기에도 기계가 일자리를 대신해서, 노동자들이 기계를 부수는 러다이트 운동이 있었다. 자본주의의 성장, 물질 숭배, 첨단 산업의 지속적인 등장. 모두 같은 말이다. 그 결과는 빈부 격차와 자연 파괴다. 환경 파괴로 인한 고통도 가난한 이들의 몫이다.

영어는 자본주의의 역사

영어의 역사는 자본주의의 역사이자 근대성의 요란한 흔적이다. 영국의 지배로 시작된 영어의 세계사적 등장은 북미 대륙을 접수했고 이후 맥도널디제이션(McDonaldization)으로 불리는 미국 중심의 글로벌 자본주의는 영어의 위상을 확고히 했다. 당대는 어떠한가. 번역 기능이 있긴 하지만, 매일 전세계 수십억 명의 인터넷 사용자들이 영어로 된 구글 문서를 찾는다. 플랫폼 자본주의로 영어 권력은 극에 달했다.

모든 권력은 끝이 있다. 팍스 로마나는 망했고, 팍스 아메리카나도 망할 것이다. 하지만 미국은 망해도 영어는 안 망한다. 영어로 씌어 있는 글은 영원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문화 권력이다. 내가 아는 한, 당대 인문사회문학 분야에서 미국은 가장 지식 생산이 활발한 나라다. 그들은 지식, 돈, 무기를 다 가졌다. 특히 지식은 자원이 무엇인가를 정의하고 분배하는 자원 중의 자원이다. 탈식민주의, 여성주의도 미국이 가장 발달했고 많은 진보 담론이 미국에서 생산된다.

문제는 미국이 ‘지식 왕국’이라는 사실이 아니다. 지식 권력이야말로 가장 분화되어야 할 영역인데, 한국은 스스로 미국의 지배를 갈망하는 사회다. 우리의 미국주의는 환장(換腸)할 수준이다. 전세계에서 미국으로 몰려온 학생들이 자국의 자료를 ‘바치고’ 미국 박사가 된다. 한국은 대단하다 못해 특수하다. 2002년 외국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대학 교원 중 66.3%가 미국에서 ‘공부했다’(2002년 설훈 민주당 의원실, <대학교수 10년의 변화>).

앞서 말했듯이 문제는 현실이 ‘아니라’ 한국 사회의 태도다. 한국이 미국 박사 배출에서 중국에 밀렸다며 이를 글로벌 인재 양성의 적신호라고 개탄하는 우려(<문화일보>, 2008년 7월21일자)는 이공계의 특수성으로 이해해야 할까. 1999년부터 2003년까지 계열 불문, 미국 외 대학 가운데 미국 박사 취득자의 출신 학부 1위는 ‘동방의 작은 나라’에 있는 서울대다. 미국 전체 대학 중에서도 버클리대에 이어 두 번째다. 중국과 인도가 그 뒤를 이었지만, 세 나라의 인구 비율을 고려할 때 이는 “편향” 정도가 아니다. 우리는 미국의 한 주(州)다. 물론 미 연방의 대접을 받지 못하는 외부에 있는 내부 식민지다.

탈식민으로서 영어 교육

한국 사회에서 영어를 못하면 취업과 진학은 물론 시민권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어 능력은 지식, 교양, 학력(學力)으로 간주된다. 하지만 실제로 영어가 업무와 직결된 직장인이 전체 인구의 몇 퍼센트나 될까. 생각보다 많지 않다. ‘일반인’에게 영어 스트레스에 대해 질문하면, “외국인에게 길 안내를 위해”, “해외여행을 위해”라는 이들이 많다. 막연한 불안감이다.

미국 박사 논문 중에는 한국에서 본인이 쓴 석사 논문을 박사 논문으로 둔갑시킨 경우, 한국의 남의 논문을 표절 번역한 글들, 현지 지도 교수의 방치 흔적이 역력한 난센스 논문도 많다. 실력은 사회적 조건과 개인적 차이이지, 학벌이 아니다. 더 나아가 능력의 개념 자체가 논쟁의 대상이다.

모든 국민이 영어 스트레스로 평생을 보낸다면, 이는 일제 시기보다 더한 식민 상태다. 영어로부터 자유로운 사회를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초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기초 한자 병기를 제안하면, 비난하는 교사들이 많다. 한자는 한국어를 구성하는 결정적인 부분인데도, 학습량만 늘리고 사교육을 부추긴다며 염려한다. 그러나 외국어 조기 교육의 효율성, 중요성은 당연시된다(잘못 알려진 교육학 이론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은 영어의 의미가 강화될수록, 우리의 지식 생산은 후퇴한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선진국’이 자국이 필요로 하는 지식을 생산하고 이를 보편적 지식이라고 우길 때, 영어를 공부한다. 지배자는 자기 언어만 해도 잘난 체하고, 피지배자는 두 가지 언어 능력을 가져도 억압받으며 지배자의 언어를 배우느라 정신이 없다. 두 가지를 동시에 잘할 수 없는 상황에서, 피억압자만 이중 노동을 하는 구조다. 식민주의가 작동하는 간단한 원리다.

미국인은 영어만으로도 학문이나 일상생활에 지장이 없다. 그나마 알파벳을 못 읽는 문맹도 20%가 넘는다. ‘영어=공용어’이므로 ‘웬만한’ 미국 작가가 쓴 책은 여러 개 언어로 출간된다. 우리 출판 시장은 그런 번역서가 점령하고 있다. 국내 필자의 ‘깊이 있는 책’은 생산되기도, 생존하기도 힘들다.

‘세계적인 미국의 석학’들이 어렸을 적부터 한국어를 필수로 공부하고 그 점수로 대학을 간다면? 아랍이나 동아시아 지역에서 받은 학위와 두 개 이상의 언어를 구사해야만 대학 교원이 될 수 있다면? 총기 난사가 더 빈발할지도 모른다. 관료라면 모를까, ‘지식인’이 지식 생산 능력 대신 강대국 사람과 얼마나 회화를 잘하는가에 따라 평가되는 사회에서는 교육의 의미가 없다.

나는 개인적으로 외국어 공부에 대해 두 가지 입장을 가지고 있다. 모국어가 정확해야 외국어도 의미가 있다. 그래야 ‘2개 국어’가 가능하다. 외국어도 모국어로 배운다는 이 간단한 이치를 왜 모를까. 또 하나는 영어를 비롯한 외국어 자체는 지식이 아니다. 도구일 뿐이다. 영어를 절대시하기보다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어떤 분야든 대체 불가능한 전문가가 되면, 저절로 통역이 제공된다. 세상은 콘텐츠를 원한다.

예전에는 동네에 하버드 보습 학원 같은 소박한 이름이 흔했다. 최근 나는 다음과 같은 상호를 발견했다. (캐나다의 ‘명문대’) 맥길대 박사 직강. 초등학생 대상의 작은 학원이었다.

정희진ㅣ여성학 연구자·문학박사. 글쓰기와 책읽기를 좋아한다. ‘논문, 비평, 수필, 편지, 칼럼’ 등 글의 장르는 없다고 생각한다. 여성학 연구자로서 공부의 목적은, 기존의 논쟁 구도와 전선을 이동시키는 것이다. 여성주의와 탈식민주의 관점에서 한국 현대사를 재해석하는 데 관심이 있다. 휴대전화를 사용하지 않는다. tobrazil@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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