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전용사 가족의 눈물

한겨레 2021. 6. 21. 1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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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은 호국보훈의 달이다.

국가는 조국을 위해 희생한 당사자 및 유가족의 생계 안정을 도모하고 건전한 사회인으로 자립할 수 있도록 법률로 지원하고 있다.

하지만 아직도 국가유공자로 지정받지 못한 유가족들은 분명하게 존재할 것이다.

당시 주위에서 원호대상자 신청을 권유하였지만 "아들의 죽음 값을 돈으로 받을 수 없다"는 할아버지의 완고한 거부로 참전용사의 명예도 유가족에 대한 보훈 혜택도 멀어진 계기가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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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면]  이인요ㅣ퇴직 공무원·경북 포항시 북구

6월은 호국보훈의 달이다. 국가는 조국을 위해 희생한 당사자 및 유가족의 생계 안정을 도모하고 건전한 사회인으로 자립할 수 있도록 법률로 지원하고 있다. 하지만 아직도 국가유공자로 지정받지 못한 유가족들은 분명하게 존재할 것이다.

2021년 3월, 국가보훈처로부터 아버지가 국가유공자로 지정이 확정되었다는 통보를 받았다. 전쟁이 발발하자 해병대에 입대하여 전장을 누비다 총상을 입고 짧은 삶을 마감한 아버지가 거의 70년 만에 국가유공자로 지정을 받은 것이다. 전쟁터에 나간 후 소식 한장 없던 아버지가 부상으로 진해해군병원으로 후송되어 있다는 소식이 전해진 후 휴전이 된 어느 날 아버지는 불편한 몸을 겨우 가누며 집으로 돌아왔다. 전역할 때 군의관에게 앞으로 5년 정도 살 거라는 말을 들었다는 아버지는 끝내 부상의 후유증을 이겨내지 못했다.

당시 주위에서 원호대상자 신청을 권유하였지만 “아들의 죽음 값을 돈으로 받을 수 없다”는 할아버지의 완고한 거부로 참전용사의 명예도 유가족에 대한 보훈 혜택도 멀어진 계기가 되고 말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스물여섯살 어머니의 치마저고리는 언제나 땀에 젖은 소금기로 허옇게 물들어 있었다. 그런 어머니의 삶을 보면서 원호대상자가 되지 못하는 이유에 대한 의구심이 마음속에 자리 잡기 시작했다. 이후 중고등학교를 거치면서 원호대상자임에도 소외되어 있음을 알았지만 원호대상자가 되는 길은 찾을 수가 없었다.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전에 본인이 죽은 후에 남아 있는 가족들이 보훈연금이라도 받게 해야겠다고 해당 기관을 찾아가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움직임이 불편한 몸으로 끝내 보훈대상자 신청을 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아버지의 명예를 회복시켜드리는 일은 반드시 내가 해결해야 할 과제였다. 공무원이었던 나는 보훈지청을 찾아가 필요 서류를 확인하였으나 진해해군병원의 진료기록은 해군병원의 화재로 소실되면서 찾을 수가 없다는 답변뿐이었다. 여러 경로를 통해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국가유공자 신청에 요긴한 서류들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들과 어머니가 합석한 자리에서 어머니는 전쟁터에서 온몸이 부서져 돌아온 아버지 이야기를 담담하게 풀어내기 시작했다. 며칠 후 친구는 국가유공자 신청을 다시 하라며 군대 관련 전문변호사가 있다며 추천을 해왔다. 이미 포기한 일이라며 안 될 일에 더 마음 다치고 싶지 않다며 나는 거절했다. 하지만 군법무관을 거쳐 고등군사법원장까지 역임한 군부대 전문변호사로 아버지와 유사하게 국가유공자로 선정되지 못한 여러 건을 해결하였다는 말에 마지막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연락을 하게 되었다.

변호사의 조언을 얻어 국민신문고를 통하여 국가유공자 신청에 필요한 서류들을 요청하였더니 병상일지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답변이 왔다. ‘역시 안 되는 일이었구나’ 하고 낙심하고 있을 때 변호사는 아버지의 군번이 두개라는 사실을 알아내고 다시 신청하라는 연락을 줬다. 덕분에 수십년을 찾아다녔던 아버지의 병상일지와 필요 서류들을 받아 들 수 있었다.

서류들을 챙겨 들고 국가유공자 신청서를 접수하던 날은 지난날의 회한에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아버지는 70년 만에 국가유공자로 지정이 되었다. 참전용사의 명예도 회복이 되었으니 많이 늦었지만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다. 여생이 많이 남지 않은 어머니께서 하늘나라에서 아버지를 만나면 국가유공자라는 선물 보따리를 풀 수 있어서 너무 다행스럽다. 오랜 숙제를 풀어주신 변호사님께 머리 숙여 감사드린다.

혹여 아직도 국가유공자로 지정받지 못한 유가족에게 이 글이 길라잡이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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