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대신 외교하는 '애국 법관'

노주희 2021. 6. 21. 0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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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 법관이 자신만의 애국심에 도취되어 법리를 초월한 '판결 외교'를 하는 동안 정작 정부는 문제 해결을 위한 의지와 노력을 보이지 않았다.
ⓒ연합뉴스

4년 전 일이다. 2015년 박근혜 정부 시절 이루어진 ‘12·28 한·일 위안부 합의’와 관련해 한국과 일본이 주고받은 협상 문서를 공개하라는 항소심 첫 재판이 서울고등법원에서 진행 중이었다. 재판장이 당시 원고 소송대리인이던 내게 물었다. “정보공개로 일본에서 한국산 제품 불매운동이 일어나면, 그래서 한국 경제가 어려워지면 책임질 건가요?”

귀를 의심했다. 정보공개법은 모든 국민이 아무런 사유 없이 공공기관에 정보의 공개를 청구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비공개하려면 공공기관이 같은 법에 따른 정당한 사유를 입증해야 한다. 앞으로 일어날지 알 수 없는 일본의 불매운동까지 들먹이며 ‘정보공개를 청구한 책임을 지라’는 것은 관계법령에 따라 심판을 해야 할 법관이 할 말은 아니었다. 재판장은 결국 원고 승소였던 1심 재판을 뒤집었다. 판결문에는 “일본과 장래에도 (…) 긴밀한 관계를 유지할 필요성”이 언급되었다(사건은 대법원 계류 중이다).

6월7일, 또 한 번의 역사적인 판결이 있었다. 일본 강제징용 피해자 85명이 일본 전범 기업 16곳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청구 소송 이야기다. 이미 2012년과 2018년 대법원에서 두 차례에 걸쳐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배상청구 권리를 인정했는데도 불구하고, 서울중앙지방법원 제34민사부(재판장 김양호)는 이들의 청구를 ‘각하’하고 말았다. 이들의 청구가 정당한지를 따지기에 앞서 아예 소송을 할 권리조차 없다고 판결한 것이다. 피해자들의 청구는 일본과의 관계를 훼손하고, 이는 다시 한·미 동맹 훼손으로 이어져, 결국 헌법상 안전보장을 저해하는 ‘권리남용’이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민법은 불법행위로 피해를 입은 국민이면 누구나 그 불법행위와 손해, 그 사이의 인과관계를 입증해 배상받을 수 있도록 하고 있다. 피해자들은 자신이 ‘일본’ 기업을 상대로 민법상 손해배상을 청구한 행위가 ‘미국’과의 동맹관계를 훼손함으로써 ‘한국’의 안전보장을 위협하는 ‘나쁜 짓(권리남용)’이라는 판결을 받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그것도 자국의 법정에서 말이다.

법관은 각각 독립한 헌법기관이다.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그 양심에 따라 독립적으로 심판할 수 있다(헌법 제103조). “양심에 따라” 심판하는 것이므로 심판 과정에서 법관 개인의 고유한 경험과 가치관, 정치적 입장 등이 완전히 배제되기는 어렵다. 그러나 이러한 사정은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최소한 형식적으로라도 법리라는 테두리 내에서 반영된다. 법리 없이 또는 법리를 초월해 그저 판사의 주관만으로 이루어진 판결은 ‘원님 판결’이라는 비판을 면치 못한다. 위 두 사건의 법관들이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이들의 판결은 법리를 초월해 이루어졌다. 이를 구비하려는 최소한의 위선조차 보이지 않았다.

 

‘위안부’ 피해자인 이용수 인권운동가는 위안부 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ICJ)에 회부하자고 한국 정부에 촉구하고 나섰다.ⓒ시사IN 신선영

‘사법부 판단 존중한다’는 원론만 되풀이하는 정부

한·일 관계가 수년째 표류하는 사이 일본의 전쟁범죄와 관련한 사법 분쟁은 다양한 양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국내에서는 ‘12·28 한·일 위안부 합의’와 관련한 소송,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 및 소송비용 청구,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일본 전범 기업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 및 주식 압류·추심 등이 이어지면서, 법원과 심급에 따라 잇달아 엇갈린 판결이 나오고 있다. 강제징용 피해자의 일본 기업에 대한 강제집행을 허용한 한국 법원 판결에 반발해 일본 정부가 시행한 일본산 반도체 부품의 한국 수출규제를 놓고 한·일 간 세계무역기구(WTO) 분쟁도 진행 중이다. ‘위안부’ 피해자인 이용수 인권운동가는 위안부 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ICJ)에 회부하자고 한국 정부에 촉구하고 나섰다.

이렇게 모든 문제가 사법의 영역으로 떨어지는 가운데, 우리 정부는 사법부의 판단을 존중하겠다는 원론적 입장만 되풀이하고 있다. 행정부가 사법부를 존중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일부 법관이 자신만의 애국심에 도취되어 법리를 초월한 ‘판결 외교’를 하는 사이, 정작 정부에서는 문제 해결을 위한 의지와 노력이 잘 보이지 않는다. 외교의 주체는 법원이 아니라 정부다.

노주희 (경기국제평화센터장·변호사)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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