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팀장 칼럼] 재하도급 없는 것으로 '안다'는 CEO는 중대재해처벌법 어떻게 생각할까

연지연 기자 2021. 6. 21.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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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2월 10일.

"재하도급은 불법이기 때문에 없었던 것으로 '안다'." 그런 줄로 '안다'는 말로 교묘히 피해갔다.

사실 HDC현대산업개발 한 곳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불법 재하도급을 주는 일이 벌어져도 "그런 일이 없는 것으로 안다"고 말하는 것이 한국 대형 건설사 CEO의 수준이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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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2월 10일. HDC현대산업개발이 연초부터 승전보를 전해왔다. 광주광역시 동구 학동4구역 주택 재개발 정비사업을 수주했다고 공시한 것이다. 아파트 19개동, 총 2282가구를 짓는 대규모 공사. 계약금액만 4630억원이었다. 이는 2016년 현대산업개발 매출의 10%에 해당하는 수준이다.

현대산업개발에게 학동 4구역은 오랜기간 공 들여온 사업지였다. 2014년 ‘무등산 아이파크(학동3구역)’를 성공적으로 분양한 것을 토대로 학동4구역 정비사업지 주민들과 신뢰를 쌓았다. 지방 사업장이었지만 현장 밀착형으로 조합원들의 지지를 이끌어냈다. 여느 정비사업장처럼 조합원들과 울고 웃는 일상도 나눴다. 수주를 위해 조합원들과 어느 정도로 감정을 교류하느냐고 물으니 한 건설사 관계자가 이렇게 답했다.

“웃풍이 부는 그런 쓰러질 것만 같은 집에 혼자 살던 할머니가 아직도 기억난다. 벽에 딸·아들 사진이 줄줄이 붙어있고, 그렇게 자식 자랑을 하셨다. 그런데 그 자식들은 나보다도 할머니를 안 찾더라. 명절 때도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꼭 그런 자식들이 재개발 막바지인 관리처분인가 총회 때는 할머니 팔짱을 끼고 나타난다. 한 쪽은 며느리, 한 쪽은 딸이겠지. 남의 집 일인데도 화가 나더라.”

이렇게 정성을 다해 정비사업 수주전에서 승리한 이후는 어떨까. 2021년 6월 9일. 철거 중이던 건물이 도로로 무너지면서 17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학동 4구역의 사고를 보면, 시공사는 현장에 수주를 할 때 만큼의 정성을 들이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사고 하루 뒤 광주를 찾은 권순호 HDC현대산업개발 대표의 사과가 대표적이다.

권 대표의 사과는 발빠른 것이었지만 내용은 비겁했다. 사고의 원인 중 하나로 지목되던 불법 재하도급 여부에 대해 권 대표이사는 이렇게 말했다. “재하도급은 불법이기 때문에 없었던 것으로 ‘안다’.” 그런 줄로 ‘안다’는 말로 교묘히 피해갔다. 그러나 재하도급 사실은 금세 드러났다. 시공사가 불법 하도급을 묵인했다는 법적 책임을 피해가기 위해 알면서도 한 거짓말일까. 설사 정말 몰랐다고 하더라도 문제다. 시공사로서 현장에 무관심했다는 책임은 피하기 어렵다. 수주에 나설 때의 그 현장 밀착형 정성은 도대체 어디로 간 것일까.

사실 HDC현대산업개발 한 곳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사고 직후 건설사 관계자들을 취재해 보니 이런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시공사에게 중요한 건 철거 진행율이다. 시행사와 약속한 날짜를 지키는 게 중요하다. 철거업체가 ‘한솔’인지, ‘백솔’인지 시공사로선 관심 밖의 일이었을 것이다. 건물을 아래부터 부쉈는지, 위부터 부쉈는지도 중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도 사정은 비슷하다.”

지금까지 중대재해처벌법이 과하다는 건설사들의 입장에 일견 공감해왔다. 수많은 사업장에서 일어날 수 있는 사고를 전부 사업주의 형사처벌감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생각해서다. 하지만 안전보다는 공정률을 챙겨야 하는 것이 대다수 현장의 상황이라면. 불법 재하도급을 주는 일이 벌어져도 “그런 일이 없는 것으로 안다”고 말하는 것이 한국 대형 건설사 CEO의 수준이라면. 중대재해처벌법 도입은 필요한 것이 아닐까. 조금 더 정교하게 고쳐서 말이다. 과잉입법 탓만 하지 말고 건설현장에서 죽는 사람 수가 줄지 않는 현실을 다시 생각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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