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시행의 뉴욕 드라이브] 영어쓰는 北 외교관이 주차 티켓을 건넸다
뉴욕시 맨해튼구 동쪽에 위치한 루스벨트 아일랜드. 좁고 긴 형태의 섬으로 약간 외진 곳의 주거 단지로 외지인의 왕래가 드문 곳이다.
이곳엔 유엔 북한 대표부에 근무하는 북한 외교관 10여 명과 그 가족이 단체로 살고 있다. 1991년 북한의 유엔 가입 당시 주유엔 북한 대표부가 있는 맨해튼 도심보다 아파트 임대료가 싸고 보안이 낫다며 거주지로 택했다. 이들은 맨해튼까지 20분 걸려 출퇴근 하는데, 상호 감시를 위해 여러 명이 승합차를 함께 타고 다니며 일체의 대외 접촉을 기피한다.
얼마 전 휴일에 이곳에 들렀을 때 일이다. 길거리에 차를 세워 놓고 주차요금 미터기 앞에 섰다. 갑자기 웃음기 섞인 북한 억양이 선명하게 들렸다. 놀라서 고개를 들어보니 40세 안팎의 남성 2명과 여성 1명이 보였다. 이들은 주차해뒀던 ‘인피니티’ 승용차를 타고 떠나려던 참이었다.
이 중 한 남성이 기자에게 다가왔다. 유창한 영어로 “내가 일찍 떠나게 돼서 미리 결제한 주차 시간이 30분쯤 남았다. 이걸 쓰겠느냐”면서 주차 티켓을 건네줬다. 기자는 영어로 “고맙다”며 몇 마디 나누다가 한국어로 “혹시 한국인이세요?”라고 물어봤다. ‘발렌시아가’ 티셔츠를 입은 그가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이는가 싶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일행이 탄 차를 몰고 떠나버렸다.
옆을 둘러 보니 맨해튼이 보이는 잔디밭에서도 할머니와 젊은 부부, 어린아이 등 4인 가족이 돗자리를 펴고 앉아 또렷한 북한 억양으로 즐겁게 대화하고 있었다. 옆에 다가선 기자의 가족이 한국어를 하자, 이들은 갑자기 튕겨나듯 일어나 30m쯤 떨어진 곳으로 자리를 옮겨 대화를 할 수 없었다.
뉴욕의 유엔 북한대표부는 미국 땅에서 북한 당국이 유일하게 합법적으로 주재해 ‘뉴욕 채널’로 불린다. 이 뉴욕 채널은 현재 가동되지 않고 있다. 우리 유엔대표부 관계자가 어쩌다 김성 북한 유엔대사를 마주쳐 대화를 시도해도, 북의 대외 입장만 앵무새처럼 복창한 뒤 사라진다고 한다.
반면 루스벨트 섬에서만큼은 이들도 평범한 뉴욕 시민으로 살아가고 있다. 이 중 일부는 한국 이웃과 통성명을 하고, 김치를 나눠 먹는다는 소문도 있다. 자본주의의 심장 뉴욕에서 이들은 ‘본국’에 무슨 동향을 보고할까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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