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민간억류인" 친공포로냐 반공포로냐 택일을 거부했다

한겨레 2021. 6. 21. 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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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33살 프로젝트 : 김수영][거대한 100년, 김수영] ⑤ 한국전쟁
"인간 아니었고" "생명 없는"
포로생활 2년 만에 석방
가장 비참하게 추락했지만
'쓰디쓴 유머'로 높이 비상
석방 뒤 낸 '달나라의 장난'
저 혼자 돌아가는 팽이 비유
'의용군 포로' 선명한 낙인
그는 자유가 중요했지만
남한은 반공이 중요했다
좌우 대치 꽈배기로 엮어
이분법 극복하려 안간힘
분단이 만든 통념 앞에
늘 '자유의 언어'를 꿈꿨다
김수영 포로 체험기 ‘내가 겪은 포로 생활’(발표 당시 제목은 ‘시인이 겪은 포로 생활’)이 실린 <해군> 1953년 6월호 표지. 박태일 제공

1952년 11월28일, 온양 온천 근처의 국립구호병원에서 김수영은 민간인 자격으로 석방되었다. 기밀 해제된 미군의 포로수용소 운용 보고서에 의하면, 포로수용소에는 여자와 아이들을 포함한 민간인들이 4만여명 수용되어 있었다. 전쟁 전 38선 이남 거주자들인 이들을 미군은 ‘Civilian Internee’(민간인 피억류자) 혹은 ‘CI’로 불렀다. 시인 김수영도 그들 중 한 명이었다. 당시 한국 정부는 ‘민간인들’, 즉 남한 출신으로서 공산주의자가 아니라면 즉각 석방하라고 주장했다. 미군은 반대했다. ‘한 번이라도 아군 쪽으로 총을 겨누었던’ 이들을 전쟁 중에 석방하는 것은 신중하지 못한 조치라는 이유였다.

포로수용소에서 민간인들이 처음 석방된 것은 1952년 6월29일이다. 7월과 9월에 다시 4만여명이 2차 ‘귀향 작전’으로 석방되었다. 11월에 3차 ‘추수감사절 작전’으로 석방이 이루어졌다. 김수영은 맨 마지막인 ‘추수감사절 작전’으로 석방되었다. 그간 일각에서는 반공포로들보다 김수영이 일찍 석방된 것에 대해 특혜를 받지나 않았나 하는 추측이 없지 않았다. 미군 기록은 김수영의 석방이 민간인들 중에선 가장 늦게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려준다.

포로번호 103655, 가슴팍과 등짝, 무르팍과 궁둥이에 PW(Prisoner of War: 전쟁 포로)라고 커다랗게 페인트로 표시한 죄수복을 입고 김수영은 포로수용소에서 25개월을 보냈다. 포로는 “인간이 아니었고” “생명이 없는 것”이었다고 김수영은 산문 ‘내가 겪은 포로 생활’에서 썼다. 한국전쟁을 기록한 사진에는 발가벗긴 채 끌려가는 사진이 적지 않다. 무기를 버리고 항복하는 병사를 그대로 쏴버리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포로수용소라는 곳이 전쟁터와 진배없이 참혹한 곳이었다는 것은 상당히 알려져 있다. 화장실에서 목이 잘린 시체가 떠오른다거나 철조망에 사지가 훼손된 시체가 내다걸리는 곳이 포로수용소였다.

거기서 풀려났지만 김수영은 한동안 몸과 마음이 모두 마비된 듯했다. 그는 앞서 인용한 산문에서 “세계의 그 어느 사람보다도 비참한 사람이 되리라는 나의 욕망과 철학이 나에게 있었다면 그것을 만족시켜 준 것이 이 포로 생활이었다”고 썼다. 국수를 먹으며 ‘공자의 생활난’이라고 쓰고 철조망 속 포로 생활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떠올리는 김수영이지만 쓰디쓴 유머다. 하지만 이것이 김수영이다. 그는 가장 비참하게 추락해도 가장 높은 정신적 비상을 잊지 않았다.

김수영 시 ‘달나라의 장난’ 육필 원고. 출처 <김수영 육필시고 전집>(민음사)
김수영 시 ‘조국으로 돌아오신 상병포로 동지들에게’ 육필 원고. <김수영 전집>에는 제목이 ‘조국에 돌아오신…’으로 되어 있으나 이는 편집자의 착오이며 다음 판에서는 원래대로 ‘조국으로…’로 바로잡을 것이라고 엮은이 이영준 교수는 <한겨레>에 밝혔다. 출처 <김수영 육필시고 전집>(민음사)

포로수용소에서 풀려난 그가 처음으로 발표한 시가 ‘달나라의 장난’이다. 남들이 살아가는 모습이 그에겐 너무나 낯설었다. 자신의 처참한 경험을 알 리 없는 그들과 섞여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일이 힘들었다. 저 혼자 돌아가는 팽이가 바로 자신의 모습이었다. 자신은 그저 “스스로 도는 힘을 위하여” 돌고 있는 것이며 “울어서는 아니 된다는 듯이” 돌고 있다는 이 시는 많은 이들을 울렸다.

북한의 의용군이었고 포로수용소에 2년간이나 수용되어 있었다는 사실은 지울 수 없는 낙인이었다. 강제로 징집되었든 아니든 상관없었다. ‘조국으로 돌아오신 상병포로 동지들에게’라는 시에서 김수영은 “내가 포로수용소에서 나온 것은/ 포로로서 나온 것이 아니라/ 민간 억류인으로서” 나온 것이라고 썼다. 이것은 장발장의 호소라며 가슴을 열어 여길 보라고 외쳤다. 하지만 그의 호소는 공감받지 못했다. 어떤 친구가 “다시 포로수용소에 들어가고 싶은 생각이 없느냐고” 그것도 “정색을 하고” 물어보았다는 구절은 끔찍하다. 그 친구는 “민간 억류인” 같은 어정쩡한 신분 말고 ‘반공’포로가 되어야 남한에서 살 수 있다는 것을 김수영에게 알려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김수영은 자유가 중요했지만 남한 사회는 반공이 중요했다.

지금도 그러하지만, 포로라면 친공포로와 반공포로, 이 둘로 보는 것이 한국 사회의 보편적인 인식이다. 전쟁 후에 쏟아진 포로 경험 수기와 문학작품들은 거의 모두 양쪽으로 쪼개진 포로들이 벌이는 사생결단의 충돌을 그리고 있다. 김수영은 친공포로와 반공포로 중 하나를 택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포로가 아니라 “민간 억류인”이라고 말한다. 당시 언론이 사용한 “민간인 포로”라는 말과도 다르다. 하지만 김수영이 말하는 “민간 억류인”은 미군 문서에 사용하는 공식 용어일 뿐이다. 남한 사회의 독법으로는 김수영은 반공포로냐 친공포로냐의 양자택일을 피하고 있다. 자신의 진실은 거기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김수영의 작품에서 양극의 대치 상태를 배치하고 그것을 다시 엇갈리게 꽈배기로 엮는 현상을 자주 볼 수 있다. 이분법을 극복하려는 시인의 안간힘의 표현이다.

<희망> 1953년 8월호 표지. 문승묵 제공
<희망> 1953년 8월호에 발표된 김수영 산문 ‘나는 이렇게 석방되었다’. 문승묵 제공

‘조국으로 돌아오신 상병포로 동지들에게’는 같은 시기의 수기들과 함께 포로수용소에서 나온 이후 풀이 죽어 말이 없는 김수영에게 문인 친구들이 권해서 쓴 걸로 알려져 있다. 제발 좀 너도 반공포로라고, 반공포로들과 함께 싸웠다고 써. 그러지 않으면 ‘부역자’라는 걸 자인하는 걸로 보일 거야, 그렇게 충고했을 것이다. 김수영의 포로 경험에 대한 글들에서 그런 의도가 비치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가 아는 바대로, 김수영은 ‘약은 사람이 못 된다’. 이 시는 발표되지 못했다.

미군 문서에 의하면 포로수용소에 수용된 17만여명 중에 “민간 억류인”은 4만명이 넘는다. 포로교환 협상을 무시하고 이승만이 일방적으로 석방해서 세계를 놀라게 한 반공포로 숫자보다 두 배 가깝다. 김수영이 자신이 포로가 아니라 “민간 억류인”이라고 말한 것은 사실에 부합한다. 하지만 당시 신문에서도 “민간인 포로”라는 표현을 쓰고 있을 뿐, 김수영이 사용한 “민간 억류인”이란 표현은 보이지 않는다. 민간 억류인으로 분류된 사람들은 포로 교환의 대상도 아니어서 일찌감치 석방되었다. 김수영은 자신이 포로가 아니라 “민간 억류인”이었다고 호소했지만 세상은 그를 ‘포로’로 생각했다. ‘포로’라고 쓰면 당시 용어로 ‘적구’(빨간 개, 즉 빨갱이)로 낙인찍힌다. 당사자로선 목숨이 걸린 문제다. 지금도 연구자들은 잘못된 통념에 따라 김수영이 포로였다고 쓰고 있다. 자신의 말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언급이 김수영의 시에 더러 나타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분단과 전쟁이 만들어낸 완악한 통념의 힘 앞에서 김수영은 심한 무력감을 느꼈을 것이다.

김수영은 여기서 더 나아간다. 자신이 자유를 위해 출발했고 비록 포로수용소에서 끝난 여정이지만 자신의 생명과 진실에 대해선 후회가 없다고 선언한다. 그리고 자유를 연구하기 위해 미 국무성이 지원을 해서 보급한 <나는 자유를 선택하였다> 같은 책을 읽을 필요가 없다고 선언한다. 이 전쟁은 우리 자신의 자유를 위한 전쟁이었다는 진술은 강력한 독립선언이자 자기 진실의 확인이다.

그 이유가 이어진다. 그는 “꽃같이 사랑하는 무수한 동지들과 함께/ 꽃 같은 밥을 먹었고/ 꽃 같은 옷을 입었고/ 꽃 같은 정성을 지니고/ 대한민국의 꽃을 이마 위에 동여매고 싸우고 싸우고 싸워 왔다”고 주장한다. “꽃 같은 밥”, 이게 무슨 말일까. 초기시로부터 후기의 ‘꽃잎’에 이르기까지 꽃은 김수영 시세계의 핵심적 비유다.

한국전쟁기 미군 포로수용소 운용 보고서 겉표지. 이영준 제공

놀랍게도 꽃은 김수영 시에서 언제나 죽음과 동반한다. 김수영은 꽃의 과거와 미래를 시간의 관점에서, 변화의 관점에서 본다. 생물학적 정의에 따른다면 꽃은 식물의 생식기관이다. 꽃은 새로운 생명이 준비되는 기관이기 때문에 죽음과 탄생이 공존하는 표상이기도 하다. 꽃이 혁명의 비유가 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전쟁에서 경험한 무수한 죽음과 그 죽음을 바쳐서라도 추구할 자유가 꽃의 이름으로 불리는 이 광경은 김수영 시학이 재탄생하는 순간이다.

그는 포로 경험으로부터 자신의 시가 변했다고 쓴다. “나의 뒤만 따라오는 시가 이제는 나의 앞을 서서 가게”(‘내가 겪은 포로 생활’) 되었다는 이 진술은 김수영 시를 이해하는 열쇠다. 주어진 현실을 그리는 데 그치지 않고 상상할 수 있는 최고의 세계를 표현하는 자유의 언어가 그의 시다. 이 시를 쓴 다음 해, 그는 꽃과 죽음을 좀 더 구체적으로 형상화한 ‘구라중화’를 쓴다. 꽃이 죽음을 거듭하면서 피는 광경은 수차례 죽을 고비를 넘긴 자신을 묘사한 것이자 전쟁을 함께 겪은 동포들에게 바친 헌사였을 것이다.

휴전협정이 조인되기도 전에 쓴 이 시(‘조국으로 돌아오신 상병포로 동지들에게’)가 놀라운 것은 김수영이 한국전쟁을 자유를 위한 전쟁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시대를 장악한 대치 상황, 좌우 둘밖에는 선택지가 없는 이분법의 시대에 그는 냉전의 가장 거대한 빙산인 한반도를 녹일 수 있는 사랑의 언어, 자유의 언어를 죽기 직전까지 꿈꾸었다.(산문 ‘해동’)

이영준 교수

김수영에 의하면 한국전쟁은 어느 누구도 아닌 우리 자신의 자유를 위한 전쟁이었다. 김수영의 마지막 산문 ‘시여 침을 뱉어라’는 최후의 순간까지 김수영의 시적 이상이 자유라는 것을 보여준다. 김수영은 자신이 정의한 한국전쟁의 목적과 자신의 시적 이상을 일치시킨 시인이다.

이영준 경희대 교수·문학평론가

조국으로 돌아오신 상병포로 동지들에게

그것은 자유를 찾기 위하여서의 여정이었다
가족과 애인과 그리고 또 하나 부실한 처를 버리고
포로수용소로 오려고 집을 버리고 나온 것이 아니라
포로수용소보다 더 어두운 곳이라 할지라도
자유가 살고 있는 영원한 길을 찾아
나와 나의 벗이 안심하고 살 수 있는
현대의 천당을 찾아 나온 것이다

나는 원래가 약게 살 줄 모르는 사람이다
진실을 찾기 위하여 진실을 잊어버려야 하는
내일의 역설 모양으로
나는 자유를 찾아서 포로수용소에 온 것이고
자유를 찾기 위하여 유자철망(有刺鐵網)을 탈출하려는 어리석은 동물이 되고 말았다
“여보세요 내 가슴을 헤치고 보세요 여기 장 발장이 숨기고 있던 낙인보다 더 크고 검은
호소가 있지요
길을 잊어버린 호소예요”

“자유가 항상 싸늘한 것이라면 나는 당신과 더 이야기하지 않겠어요
그러나 이것은 살아 있는 포로의 애원이 아니라
이미 대한민국의 하늘을 가슴으로 등으로 쓸고 나가는
저 조그만 비행기같이 연기도 여운도 없이 사라진 몇몇 포로들의 영령이
너무나 알기 쉬운 말로 아무도 듣지 못하게 당신의 뺨에다 대고 비로소 시작하는 귓속 이야기지요”

“그것은 본 사람만이 아는 일이지요
누가 거제도 제61수용소에서 단기 4284년 3월 16일 오전 5시에 바로 철망 하나 둘 셋 네 겹을 격(隔)하고 불 일어나듯이 솟아나는 제62적색수용소로 돌을 던지고 돌을 받으며 뛰어들어 갔는가”

나는 그들이 어떻게 용감하게 싸웠느냔 것에 대한 대변인이 아니다
또한 나의 죄악을 가리기 위하여 독자의 눈을 가리고 입을 봉하기 위한 연명을 위한 아유(阿諛)도 아니다
그리고 이러한 변명이 지루하다고 꾸짖는 독자에 대하여는
한마디 드려야 할 정당한 이유의 말이 있다
“포로의 반공전선을 위하여는
이것보다 더 장황한 전제가 필요하였습니다
나는 그들의 용감성과 또 그들의 어마어마한 전과(戰果)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싸워 온 독특한 위치와 세계사적 가치를 말하는 것입니다”

“나는 이것을 자유라고 부릅니다
그리하여 나는 자유를 위하여 출발하고 포로수용소에서 끝을 맺은 나의 생명과 진실에 대하여
아무 뉘우침도 남기려 하지 않습니다”
나는 지금 자유를 연구하기 위하여 <나는 자유를 선택하였다>*의 두꺼운 책장을 들춰 볼 필요가 없다
꽃같이 사랑하는 무수한 동지들과 함께
꽃 같은 밥을 먹었고
꽃 같은 옷을 입었고
꽃 같은 정성을 지니고
대한민국의 꽃을 이마 위에 동여매고 싸우고 싸우고 싸워 왔다

그것이 너무나 순진한 일이었기에 잠을 깨어 일어나서
나는 예수 그리스도가 되지 않았나 하는 신성한 착감(錯感)조차 느껴보는 것이었다
정말 내가 포로수용소를 탈출하여 나오려고
무수한 동물적 기도를 한 것은
이것이 거짓말이라면 용서하여 주시오
포로수용소가 너무나 자유의 천당이었기 때문이다
노파심으로 만일을 염려하여 말해 두는 건데
이것은 촌호(寸毫)의 풍자미도 역설도 불쌍한 발악도 청년다운 광기도 섞여 있는 말이 아닐 것이다

“여러분! 내가 쓰고 있는 것은 시가 아니겠습니까
일전에 어떤 친구를 만났더니 날더러 다시 포로수용소에 들어가고 싶은 생각이 없느냐고
정색을 하고 물어봅니다
나는 대답하였습니다
내가 포로수용소에서 나온 것은
포로로서 나온 것이 아니라
민간 억류인으로서 나라에 충성을 다하기 위하여 나온 것이라고
그랬더니 그 친구가 빨리 삼팔선을 향하여 가서
이북에 억류되고 있는 대한민국과 UN군의 포로들을 구하여 내기 위하여
새로운 싸움을 하라고 합니다
나는 정말 미안하다고 하였습니다
이북에서 고생하고 돌아오는
상병포로들에게 말할 수 없는 미안한 감이 듭니다”

내가 6·25 후에 개천(价川) 야영훈련소에서 받은 말할 수 없는 학대를 생각한다
북원 훈련소를 탈출하여 순천 읍내까지도 가지 못하고
악귀의 눈동자보다도 더 어둡고 무서운 밤에 중서면 내무성군대에게 체포된 일을 생각한다
그리하여 달아나오던 날 새벽에 파묻었던 총과 러시아 군복을 사흘을 걸려서 찾아내고 겨우 총살을 면하던 꿈같은 일을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평양을 넘어서 남으로 오다가 포로가 되었지만
내가 만일 포로가 아니 되고 그대로 거기서 죽어 버렸어도
아마 나의 영혼은 부지런히 일어나서 고생하고 돌아오는
대한민국 상병포로와 UN 상병포로들에게 한마디 말을 하였을 것이다
“수고하였습니다”

“돌아오신 여러분! 아프신 몸에 얼마나 수고하셨습니까!
우리는 UN군의 포로가 되어 너무 좋아서 가시철망을 뛰어나오려고 애를 쓰다가 못 뛰어나오고
여러 동지들은 기막힌 쓰라림에 못 이겨 못 뛰어나오고”

“그러나 천당이 있다면 모두 다 거기서 만나고 있을 것입니다
억울하게 넘어진 반공포로들이
다 같은 대한민국의 이북 반공포로와 거제도 반공포로들이
무궁화의 노래를 부를 것입니다”

나는 이것을 진정한 자유의 노래라고 부르고 싶어라!
반항의 자유
진정한 반항의 자유조차 없는 그들에게
마지막 부르고 갈

새날을 향한 전승(戰勝)의 노래라고 부르고 싶어라!

그것은 자유를 위한 영원한 여정이었다
나직이 부를 수도 소리 높이 부를 수도 있는 그대들만의 노래를 위하여
마지막에는 울음으로밖에 변할 수 없는
숭고한 희생이여!

나의 노래가 거치럽게 되는 것을 욕하지 마라!
지금 이 땅에는 온갖 형태의 희생이 있거니
나의 노래가 없어진들
누가 나라와 민족과 청춘과
그리고 그대들의 영령을 위하여 잊어버릴 것인가!

자유의 길을 잊어버릴 것인가!

* 미국 주재 소련 외교관이었던 빅토르 크랍첸코가 미국으로 망명한 뒤 1946년에 펴낸 책으로 소련 사회의 억압상을 폭로하여 미국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1948년 한국어 번역본이 상·하 두 권으로 출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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