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출품 싣고갈 배가 없다, 컨테이너 산이 된 부산항
지난 17일 부산 강서구 부산신항 컨테이너 터미널. 야적장에 수출 물품이 실린 컨테이너들이 6단(15.5m) 높이까지 쌓여 있었다. 그 위로 크레인들이 아슬아슬하게 움직이며 컨테이너를 옮기고 있었다. 보통 항만 야적장은 컨테이너를 3~4단 높이로 쌓는다. 하지만 미국·유럽 등지로 보낼 컨테이너는 계속 들어오는데, 실어 나를 선박이 없어 컨테이너가 산을 이룬 것이다. 터미널 관계자는 “크레인이 안 걸리고 움직일 수 있는 최대 높이까지 쌓은 상태”라며 “크레인 기사들이 초긴장 상태로 작업 중”이라고 말했다.
국내 최대의 물류 항구인 부산항이 마비 직전에 몰려 있다. 글로벌 경기 회복으로 지구촌 수출입 물량은 급증하는데, 미국·유럽 항만이 코로나로 수시로 셧다운(작업 중지)되면서 촉발된 하역 지체 현상이 전 세계 주요 항구로 도미노처럼 연쇄 파급되고 있기 때문이다. 입항을 못 한 선박들이 바다 위에서 발이 묶여 보름가량 대기하는 상황이 이어지면서 선박도 컨테이너도 씨가 마른 상태다. 부산항도 그 여파를 고스란히 얻어맞고 있다.
부산항으로선 속수무책이다. 지난달 부산신항의 장치율(장치장에 컨테이너가 쌓인 비율)은 83%. 보통 장치율이 70%를 넘어서면 항만이 제대로 운영되기 어렵다. 컨테이너를 지금보다 더 높게 쌓을 수 없는 상태라, 선적 대기 시간이 3~5일 이상 걸릴 것으로 예상되는 화물 반입을 금지해 컨테이너 물량을 겨우겨우 조절하고 있다. 반입이 막힌 일부 화주는 민간 업체가 운영하는 항만 밖 임시 보관소에 웃돈을 주고 물건을 맡기고 있다.
부산신항 관계자는 “선박 부족, 항만 적체, 빈 컨테이너 수급 문제까지 겹쳐 해운 물류 동맥이 꽉 막혀 있다”며 “상반기보다 하반기 물동량이 더 많은 걸 감안하면, ‘해운 대란’은 이제 시작”이라고 말했다.
해운사들 한국패싱도 영향… 해운대란, 하반기 더 커질듯
지난 17일 부산 강서구 부산신항의 한 터미널 부두엔 1만1000TEU(1TEU는 20피트 컨테이너 1개)급과 5000TEU급 선박 2척이 정박해 화물이 실리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각각 유럽과 미주 서안으로 가는 배로 국내 해운사 HMM(옛 현대상선)이 긴급 투입한 임시 선박이다. 예전엔 배 한 척 선적 작업을 끝내는 데 하루가 채 걸리지 않았다. 최근엔 이틀씩 걸리는 경우가 빈번하다. 산처럼 쌓인 컨테이너에서 적재할 화물을 골라내는 데 시간이 걸리는 것이다. 터미널 관계자는 “부두 회전율이 떨어지다 보니 제때 접안하지 못하고 바다 위에서 길게는 하루씩 대기하다 들어오는 선박도 있다”며 “가동할 수 있는 배는 모두 움직이고 있는데도 선박은 계속 부족한 실정”이라고 했다. 글로벌 해운조사 전문기관 알파라이너에 따르면, 현재 전 세계 컨테이너 선박 유휴율은 지난 4월 기준 0.8%. 전 세계 선박 중 1%만 쉬고 있다는 의미로, 수리 중인 배를 제외하면 사실상 전 세계 모든 배가 투입된 상황이다.
◇컨테이너만 쌓았다 내렸다
이날 부산신항 터미널엔 RMGC라고 불리는 야적장 크레인 38기가 쉬지 않고 움직였다. 쌓인 컨테이너가 너무 많아 선박에 실을 화물을 찾으려 컨테이너를 테트리스(벽돌 쌓기) 게임처럼 빼고 넣고 옮기며 재조정하는 작업을 계속했다. 6단으로 쌓인 컨테이너의 맨 아래 칸에 놓인 화물 하나를 빼려면 위의 5단을 모두 움직일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다.
최근 국내 해운 업계에선 빈 컨테이너 쟁탈전도 벌어지고 있다. 하역 작업 지연으로 미국·유럽 항구에서 선박들이 입항 대기하며 열흘 이상 바다에 떠 있으면 선박뿐 아니라 컨테이너도 함께 발이 묶인다. 이 때문에 빈 컨테이너 재고를 관리하는 각 터미널엔 문의 전화가 폭주하고 있다. 일부 화주는 구멍이 뚫려 있거나 낡고 녹슨 ‘불량 컨테이너’를 구해 수리하고 청소해 사용할 정도다. 한 수출 업체 대표는 “예전엔 유럽에 매달 컨테이너 100개씩을 보냈는데 지금은 20개도 못 보낸다”며 “보낼 물건이 없는 게 아니라 컨테이너를 구할 수가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빈 컨테이너를 구한다 해도 문제가 끝나는 게 아니다. 최근 부산신항과 인접한 녹산공단과 명지 등지의 창고 앞에는 컨테이너를 실은 대형 트럭이 줄을 서 있다. 항만까지 화물차에 컨테이너를 싣고 와도 터미널이 꽉 차 들어갈 수 없으니, 민간 업체가 운영하는 보관소에 컨테이너를 내리고 돌아가려는 것이다.
◇글로벌 선사들의 ‘한국 패싱’도 악영향
최근 부산항에선 외국 선사들의 입항이 갈수록 줄고 있다. 이전엔 중국·동남아에서 출발한 선박들이 한국에서 짐을 실으려 선적 공간을 20~30% 정도 비워두고 입항했다. 하지만 최근엔 출발지에서 물건을 꽉 채운 후 곧장 미국·유럽으로 가거나, 한국에서 극히 일부 화물만 싣는 경우가 빈번하다. 중국·동남아와 비교해 운임이 싼 한국을 건너 뛰는 ‘한국 패싱’이 잦아지면서 부산항의 어려움을 가중시키고 있는 것이다. 국내 한 중견 수출 대행 업체 대표는 “요즘 중국발 운임은 한국보다 5~10%, 동남아발 운임은 20% 정도 높다”며 “중국·동남아 수출 업체들이 운임을 올려 배를 싹쓸이하는 전략을 펴기 때문”이라고 했다.
부산항만공사에 따르면 올해 1월부터 4월까지 부산항에 온 해외 선사 컨테이너선은 6411척으로 작년 같은 기간보다 11% 줄었다. 해양수산부는 지난달 외국 선사들과 만나 국내 선적 공간을 늘려달라고 요청했지만 해결될 기미는 보이지 않고 있다. 수출 대행 업체 ‘뉴월드쉬핑’ 김효곤 대표는 “선박과 빈 컨테이너 부족, 선적·하역 작업 지연에 외국 선사까지 한국을 외면하고 있다”며 “해운 물류 대란이 3분기 이후까지 장기화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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