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헤란의 도살자’ 이란 대통령 됐다... 초강경파 집권에 불안한 중동

파리/손진석 특파원 2021. 6. 20. 2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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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외 강경파 라이시, 이란 대선에서 압승... 차기 최고지도자 0순위
이란 대통령에 당선된 세예드 에브라힘 라이시 사법부 수장

이란에서 강경한 이슬람 원리주의자인 세예드 에브라힘 라이시(61) 사법부 수장이 대통령에 당선됐다. 온건파인 하산 로하니 현 대통령과 대조적으로 강경한 대외 노선을 강조하는 인물이라는 점에서 라이시의 당선은 중동 정세가 위험하게 바뀌는 변곡점이 될 것이라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미국은 라이시가 이끄는 사법부가 청소년에 대한 사형선고를 남발한다며 2019년 이후 그를 제재 대상으로 지정하고 있다. 미국이 제재 대상으로 지명한 인물이 한 국가의 대통령이 된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라이시는 과거 검사 시절 반체제 인사 제거에 앞장서 ‘테헤란의 도살자’란 별명을 갖고 있다.

이란 내무부는 19일(현지 시각) 라이시가 전날 치른 대선에서 전체 투표의 61.9%인 1792만여 표를 얻어 당선이 확정됐다고 밝혔다. 혁명수비대 장성을 지낸 2위 득표자 모센 레자에이(11.7% 득표)를 압도적인 차이로 눌렀다. 라이시는 당선이 확정된 직후 “부패를 척결해 정부에 대한 신뢰를 높이도록 노력하겠다”고 했다.

/사진=AFP 연합뉴스

라이시의 승리는 선거 실시 전부터 예견됐다. 이란은 헌법수호위원회라는 기구가 대선 후보를 결정하는 권한을 갖고 있으며, 이슬람 보수파가 장악하고 있는 이 기구는 대선 출마 의향을 밝힌 592명 가운데 개혁·중도파를 대거 제외하고 7명만 후보로 등록시켰다. 결과가 뻔한 선거에 대한 반감으로 젊은이들 사이에서 투표 보이콧 운동이 벌어졌고, 이 때문에 투표율이 1979년 이란 대혁명 이후 최저치인 48.8%에 그쳤다.

신정일치 국가인 이란에서는 최고지도자가 입법·사법·행정부를 모두 좌지우지하는 절대 권력자이며, 대통령은 그 밑에서 행정부를 이끌며 대외적으로 나라를 대표한다. 2013년 당선된 로하니 현 대통령은 강경파인 알리 호세인 하메네이 최고지도자와 달리 서방과의 대화를 강조하는 비둘기파였다.

하지만 로하니와 달리 라이시는 ‘하메네이의 분신’으로 불린다. 그의 당선으로 최고지도자와 대통령 진용이 모두 대외 강경파 일색으로 꾸려지게 됐다. 이란이 미국, 이스라엘, 사우디아라비아 등과 충돌할 가능성이 커진다는 얘기다. 하메네이는 “이스라엘은 제거해야 할 암 덩어리”라고 맹비난해왔다.

라이시는 이번 대선 당선으로 차기 최고지도자 0순위가 됐다는 말이 나오고 있다. 올해 82세이며 32년째 최고지도자로 군림하고 있는 하메네이가 라이시를 후계자로 염두에 두고 있다는 게 정설이다. 대통령만 하고 물러나는 게 아니라 향후 수십 년간 이란의 최고 실권자가 될 가능성이 있다는 의미다. 하메네이가 1970년대 중반 이슬람 교리학교 교사로 일할 때 라이시는 그의 학생이었다.

이란 최고지도자 하메네이.

21세이던 1981년 검사가 된 라이시는 1980년대 반체제 인사들의 숙청을 주도했다. 국제엠네스티는 이란·이라크 전쟁이 끝나던 시기인 1988년 테헤란지검 부(副)검사장이던 라이시가 반체제 인사들에 대한 비공개 재판 후 사형을 집행한 일명 ‘죽음의 위원회’ 판사로도 활동했다고 밝혔다. 이때 약 5000명을 사형에 처했다는 것이 국제엠네스티의 주장이다.

이스라엘 외교부는 한발 더 나가 라이시가 직간접적으로 살해한 사람이 3만명이 넘는다고 주장한다. 아녜스 칼라마르 국제엠네스티 사무총장은 라이시의 당선 직후 성명을 통해 “라이시는 살인, 고문, 실종 등 반인권 범죄와 관련해 수사를 받아야 하는 인물”이라고 했다. 영국 신문 더선(The Sun)에 따르면, 검사 시절 라이시는 임신부를 고문하며 채찍질을 가했고, 정치범들을 절벽에서 밀어뜨려 죽였다. 그는 2009년 마무드 아마디네자드 당시 대통령의 부정선거 의혹에 항의하는 반정부 시위대를 유혈 진압하는 데도 앞장섰다.

라이시 당선에 환호하는 지지자들 - 세예드 에브라힘 라이시 이란 대선 후보의 당선이 확정된 19일 수도 테헤란에서 열린 지지자들의 축하집회에서 한 어린아이가 장난감 총을 들고 있다. /AP 연합뉴스

피의 숙청을 주도한 공로로 라이시는 일찌감치 출세 가도를 달렸다. 29세이던 1989년부터 5년간 테헤란지검 검사장이 됐고, 2004년부터 10년간 사법부 내 2인자인 제1부장을 맡았다. 이후 2014년부터 2년간 검찰총장을 지내고, 2019년 사법부 수장에 올랐다.

이란과 대척점에 있는 국가들은 라이시의 당선에 우려를 표명, 이 지역의 정세가 당분간 혼미 상태에 빠질 것이라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네드 프라이스 미 국무부 대변인은 “이란인들은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 과정을 통해 대통령을 선출할 권리를 거부당했다”고 밝혔다. 라이시를 인정하지 않는 발언이라는 해석이 나왔다. 지난 13일 취임한 이스라엘의 나프탈리 베네트 총리는 라이시의 당선 소식을 듣고 “(이란이) 잔혹한 사형집행인의 체제가 될 것”이라고 했다. 이스라엘 방송 채널12는 “안보 당국자들이 이란 핵 시설을 다시 공격하는 것이 불가피하다는 인식을 하고 있다”고 했다. 리오르 하이아트 이스라엘 외교부 대변인은 “라이시는 역대 이란 대통령 중 가장 극단적인 인물”이라고 했다.

라이시가 대외 강경 노선만 고집하면 민심 이반이 나타날 수 있기 때문에 수위 조절을 할 것이라는 예상도 나온다. 이란은 2018년 다시 미국의 경제 제재를 받고 있어 대다수 국민이 일상에서 고통을 호소하고 있다. 개혁파나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미국과 원만한 관계를 회복해 제재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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