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들이 우울해질수록 가재들이 대담해진다
[경향신문]
미국 플로리다대 연구진 발표
항우울제, 하수구 통해 민물로
수중 무척추동물에 우선 축적
“주변 먹이 찾는 시간 두 배 늘고
은신처에 머무는 시간은 줄어”
사람이 복용하는 항우울제가 강이나 호수 같은 민물 생태계로 흘러들어 가재에게 전에 없던 ‘대담성’을 유발할 수 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불안감을 줄이는 항우울제 성분이 가재가 천적에게서 몸을 피해야 한다는 본능을 억제하고, 은신처 밖에서 돌아다니는 행동을 증가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미국 플로리다대 연구진 등은 지난주 국제학술지 ‘에코스피어’를 통해 인간에게 처방하는 항우울제인 ‘선택적 세로토닌 재흡수 억제제(SSRI)’가 민물로 흘러들어가면 이를 흡수한 가재에게서 이상 행동이 일어날 수 있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SSRI는 미국과 한국 등 각국에서 일반적으로 쓰이는 항우울제이다.
과학계에선 SSRI 같은 의약품이 환자의 소변이나 하수구에 버려지는 방식을 통해 생태계에 들어가면 가재 같은 수중 무척추동물에 우선 축적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연구진은 이 과정을 실험으로 재현했다. 낙엽 등이 쌓인 인공 수로를 만든 뒤 14일 동안 미국과 캐나다 민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스파이니 치크 가재’를 키운 것이다. 물에 든 SSRI 농도는 0.5㎍/ℓ를 유지했다. 하천이나 호수 등의 지표수에선 최대 76㎍/ℓ, 폐수에서는 840㎍/ℓ가 관찰된 적이 있지만, 극단적인 상황을 피하고 현실성을 높이기 위해 농도를 조정한 것이다.
실험 결과, SSRI에 노출된 가재는 주변을 탐사해 먹이를 찾는 시간이 두 배 늘었다. 자연히 은신처에 머무는 시간은 줄었다. 알렉산더 레이싱어 플로리다대 연구원은 미국 과학매체 뉴사이언티스트를 통해 “가재는 숨는 시간을 줄이고 새 환경에 적응하는 쪽을 택했다”고 말했다.
연구진은 가재가 보인 ‘대담함’의 원인이 SSRI라고 분석했다. 사람은 물론 가재 같은 동물에게도 있는 세로토닌의 수치가 SSRI의 효과로 인해 높아졌다는 것이다. 인간은 SSRI로 불안감을 누그러뜨리고, 가재는 천적 같은 외부 위협에 대한 공포를 줄인 셈이다.
문제는 가재의 이런 행동이 생태계 균형을 유지하는 데 유리하지 않다는 것이다. 가재가 은신처에서 나와 더 많은 먹이를 찾는다면 일단 물속 유기물질이 줄어드는 상황을 맞을 수 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천적에게 노출되는 횟수가 늘면서 오히려 가재의 개체 수가 감소할 가능성이 크다. ‘천적 회피’라는, 동물이 가진 일반적인 본능이 억제되는 상황이 벌어지기 때문이다. 민물 생태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가재의 개체 수 감소는 먹이사슬에 균열을 일으킬 공산도 있다. 레이싱어 연구원은 “문제를 줄이려면 가정에서 남은 약품을 하수구에 폐기하지 말고 약국 등을 통해 버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정호 기자 ru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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