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北 채널은 고장났지만.. 맨해튼 '이 동네'선 북한말 들을 수 있다

뉴욕/정시행 특파원 2021. 6. 20. 1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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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시행의 뉴욕 드라이브] 루스벨트 아일랜드에서 만난 북한 외교관들
유엔 주재 북한대표부의 외교관들이 몰려사는 뉴욕 맨해튼구 루스벨트 아일랜드의 지난 4월 모습. 원래 교도소와 정신병원이 있던 곳으로 1970년대에야 주거지로 개발됐다. 지금도 지하철이 다니긴 하지만 케이블카 통근 트램이나 승용차로 찾아 들어가야 해 외지인들의 출입이 적은 외진 동네다. /AFP 연합뉴스

뉴욕시 맨해튼구 동쪽엔 루스벨트 아일랜드라는 동네가 있다. 좁고 긴 형태의 섬으로 외진데다 주거 단지라 외지인의 왕래가 드문 곳이다. 강 건너 맨해튼 도심 야경이나 꽃 구경을 하며 한적한 시간을 보내기 좋다.

얼마 전 휴일에 이 곳에 들렀다 길거리에 차를 세워놓고 주차요금 미터기 앞에 섰다. 가까이서 웃음기 섞인 선명한 북한 억양이 들렸다. 놀라서 고개를 들어보니 40세 안팎의 남성 2명과 여성 1명이 보였다. 이들은 바로 앞에 주차했던 일제 흰색 ‘인피니티’ 승용차를 타고 떠나려던 참이었다.

연장자로 보이는 남성이 기자에게 다가와 유창한 영어로 “내가 일찍 떠나게 돼서 미리 결제한 주차 시간이 30분쯤 남았다. 이걸 쓰겠느냐”면서 주차표를 건네줬다. 기자는 “이게 양도 가능한가, 그냥 내 차에 꽂아두면 되나? 고맙다”고 몇 마디 나누다, 한국어로 “혹시 한국인이세요?”라고 물어봤다. 스페인 브랜드 ‘발렌시아가’ 티셔츠를 입은 그가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이는가 싶더니, 눈깜짝할 사이에 일행이 탄 차를 몰고 떠나버렸다.

마천루가 들어선 뉴욕 맨해튼 도심에 붙어있는 루스벨트 아일랜드(사진 가운데 길쭉한 섬) 전경. 관광객에겐 '맨해튼 야경 감상 명소' 정도로 알려져있다. 북한 외교관들은 여러 명이 승합차를 타고 20분쯤 걸려 맨해튼의 유엔 대표부로 출퇴근 한다.

이어 맨해튼이 건너다 보이는 잔디밭에서도 할머니와 젊은 부부, 어린 아이 등 가족으로 보이는 이들 4명이 돗자리를 펴고 앉아 역시 또렷한 북한 억양으로 즐겁게 대화하고 있었다. 바로 옆에 가방을 내려놓은 기자의 가족이 한국어를 하는 소리를 듣자마자, 이들은 튕겨나듯 일어나 30m쯤 떨어진 곳으로 순식간에 자리를 옮겼다.

루스벨트 섬은 북한 외교관 10여명과 그 가족이 몰려사는 곳이다. 1991년 북한의 유엔 가입 당시, 주유엔 북한 대표부가 있는 맨해튼 도심보다는 아파트 임대료가 싸고 외진 동네라 보안이 낫다며 거주지로 택해 30년째 살고 있다. 미국은 북한 외교관들을 유엔 대표부 기준 반경 25마일(40㎞)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한다. 이들은 맨해튼까지 20분 걸려 출퇴근 하는데, 상호 감시를 위해 여러 명이 승합차를 함께 타고 다니며 일체의 대외 접촉을 기피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2018년 미국 뉴욕에서 열린 제73차 유엔총회에서 김성 유엔주재 북한대사(가운데)등 북한 대표부가 문재인 대통령의 연설을 들으며 박수를 치고 있다. /AP 연합뉴스
김성 유엔주재 북한대사가 지난 2018년 뉴욕의 유엔주재 북한대표부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뒤에 김일성 김정일 부자의 사진이 걸려있다. /연합뉴스

유엔 북한대표부는 미국 땅에서 북한 당국이 유일하게 합법적으로 주재하는 곳이다. 일명 ‘뉴욕 채널’이다. 한국이나 미국의 고위 당국자가 뉴욕 공항에만 내려도 ‘뉴욕 채널이 가동되나’ 관심을 모은다. 현재 뉴욕 채널은 제대로 가동되지 않고 있다. 우리 유엔대표부 관계자가 어쩌다 김성 북한 유엔대사를 마주쳐 대화를 시도해도, 북의 대외 입장만 앵무새처럼 복창한 뒤 사라진다고 한다. 한 외교 소식통은 “바이든 정부의 정보기관(FBI)은 요즘 중국·러시아 외교관들 동선을 주시할 뿐, 북한 외교관들엔 딱히 관심이 없더라”고 했다.

루스벨트 섬에서만큼은 북한 외교관들도 평범한 뉴욕 시민으로 살아가고 있다. 이들 일부는 같은 아파트에 사는 한국 이웃과 통성명을 하고, 김치를 나눠먹는다는 말까지 있다. 자유의 도시, 자본주의의 심장 뉴욕에서 이들은 ‘본국’에 무슨 동향을 보고할까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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