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소한 것들의 소소하지 않은 역사

한겨레 2021. 6. 19. 1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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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강유가람의 처음 만난 다큐][토요판] 강유가람의 처음 만난 다큐
⑪ 개의 역사
사진 퍼플레이 제공

몇년 전 한 행사에서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왜 계속해서 그런 소소한 이야기들을 찍는지 궁금하다고. 내심 당황했다. 나 자신은 소소하다고 생각한 적이 없는데, 내가 촬영하는 이야기들이 작은 이야기로 생각되는구나. 소소함의 기준은 누가 정하는 걸까.

김보람 감독의 <개의 역사>(2017) 초반부에도 감독의 카메라를 의아해하는 질문들이 종종 등장한다. “그 개를 왜 찍어요?” 이 다큐멘터리는 서울 후암동 어딘가에서 나타난 개 ‘백구’의 역사를 탐구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백구에 대해서 아는 이를 찾고, 백구를 돌보는 이를 만난다. 하지만 사람들은 백구에 대해 묻는 감독을 궁금해하거나 이상하게 여긴다. 바로 이 지점에서 다큐멘터리의 기획의도가 보인다. 사람들이 주목하지 않는 것들, 사소하거나 하찮게 여기는 것들에도 숨은 이야기가 있을 것이다. 감독이 초등학생들에게 미디어 수업을 하는 장면은 영화의 기획의도를 상징화한다. 감독은 신문에서는 어떤 사건만 중요하게 다뤄지는데, 그 사건 이외에 다른 일들도 많이 일어났을 거라고 말한다. 하지만 사람들이 관심 있어 하는 사건만 계속 보도된다고 한다. 그렇게 세상의 관심과 실제로 일어나는 일들의 간극을 카메라는 조용히 조망한다. 낡은 빌라 단지와 높게 솟은 도심의 빌딩들. 미군이 조깅을 하면서 지나가는 남산 계단에서 사람들은 미군 부대에서 펼쳐지는 불꽃놀이를 바라본다. 그 아래 계단에는 나이 든 백구가 늘어져 있다.

다큐멘터리는 백구에서 시작되었지만 점점 자연스럽게 다른 존재들로 카메라를 돌린다. 백구를 찍기 시작했던 후암동에서 홍은동으로, 그리고 또 다른 곳으로 이사하는 장면이 반복해서 등장한다. 열다섯번째의 이사를 했다는 자막이 보여주는 것처럼 카메라는 부유하는 듯 보인다. 하지만 백구와 비슷한 또 다른 존재들을 만난다. 그 시간들 속에서 ‘나이 듦’, ‘병듦’, ‘죽음’, ‘잊힘’, ‘상실’, ‘헤어짐’에 대한 감정들이 도화지에 물감 번지듯이 밀려온다. 그 순간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고 싶어지거나, 무언가를 쓰고 싶어질 것이다. 나의 이야기를 들어주면 좋겠다고. 이 영화는 ‘백구의 역사’로 상징되는 평범한 것들의 노래이다.

특히 다큐멘터리에는 노년 여성들의 모습이 자주 등장한다. 홍은동에서 만난 노년 여성은 젊은 시절의 영화에 대한 아쉬움과, 여전히 자신의 삶이 계속 활기 있기를 바라는 꿈을 놓지 않는다. 몸을 변형해서라도 젊음을 찾고자 하는 모습은 사라진 과거에 대한 집착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감독은 그 순간의 진심을 함부로 판단하지 않는다. 노인정도 마련되지 않는 동네라서 버스정류장 인근의 정자에 나와 있는 또 다른 노년 여성들에게서 살아온 이야기를 듣고자 하는 감독의 카메라는 가끔 방해를 받는다. 갑자기 예수님을 믿으라고 일장 연설을 늘어놓는 남성과, 나이가 많아 이제 들리지도 않고 대화가 통하지 않으니 찍지 말라고 하는 보호자. 하지만 노년 여성은 자신의 삶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은 마음에 멍하니 카메라 앞에 앉아 있는 감독 옆으로 다시 슬금슬금 걸어온다.

감독은 결국 백구의 역사를 알아내는 데는 실패했다고 말한다. 이미 지나버린 것들에 대한 아쉬움은 우리가 살면서 무엇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그 중요함의 기준 때문에 우리는 삶에서 무엇을 놓치고 살게 되는지에 대한 질문으로 확장되어 간다. 그것은 중심과 주변에 대한 위계를 무화시키는 것의 중요함을 역설한다. 백구가 죽고, 백구를 돌보던 아저씨가 감독에게 메시지를 보낸다. “생각하기보다 잊음이 중요함을 갖겠습니다.” “삶을 사랑하는 방법을 찾고 싶었다”는 감독의 물음에 응하는 대답인 것일까.

영화의 마무리에 백구와 닮은 개가 다시 등장한다. 마법과도 같이 카메라에 들어온 또 다른 백구의 모습 위로 이름이 없는 자들의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간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이름이 없어도, 그렇게 삶의 무게와 의미가 영화 안에 새겨졌다.

강유가람영화감독

▶ 강유가람 감독은 <모래>(2011) <이태원>(2016) <시국페미>(2017) 등의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다. 볼만한 다큐멘터리와 그에 얽힌 이야기를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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