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오래된 인류의 농담집,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유머 '필로겔로스'

2021. 6. 19. 1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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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안 books] <필로겔로스>

[이대희 기자(eday@pressian.com)]
"현대의 농담과 놀랄 정도로 비슷하다(strikingly similar)." - 영국 코미디언 지미 카(Jimmy Carr)

고대 그리스와 로마는 현대 서구 문명의 뿌리이다. 인본주의의 문을 연 이 시대의 농담을 정리한 책 <필로겔로스>(히에로클레스 엮음, 최원택 옮김, 마름쇠 펴냄)가 한국어로 번역돼 전자책으로 출간됐다. 말하자면, 고대 그리스와 로마판 '만득이 시리즈' '최불암 시리즈'의 한국어 번역판인 셈이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인류의 농담 모음집이다.

<필로겔로스>가 서구권에서 유명세를 탄 중요한 계기는 2008년 11월 영국 BBC의 보도다. 당시 BBC는 세계적 코미디 그룹 몬티 파이선의 콩트(스케치) '죽은 앵무새'의 "조상이 되는 농담"을 발견했다고 보도했다. 해당 농담은 바로 <필로겔로스>의 18번째 농담이었다고 BBC는 밝혔다. 18번째 농담은 다음과 같다.

한 사람이 헛똑똑이를 만나서 말했다.
"당신이 내게 팔았던 노예가 죽었소."
이 이야기를 들은 헛똑똑이가 대답했다.
"오, 신이시여. 그놈은 나랑 있을 때는 그런 경우 없는 짓을 한 번도 한 적 없었소."

이와 관련한 '죽은 앵무새' 콩트는 1969년 BBC에서 방영됐다. 한 남자가 애완동물 가게에서 샀던 앵무새가 죽자 환불을 받으러 애완동물 가게를 찾아온다. 하지만 애완동물 가게 주인은 '앵무새가 피곤해서 잠시 쉬고 있다', '잠을 자는 중이다', '원래 눕기를 좋아한다'는 등 황당한 변명으로 일관하며 환불 요구를 거절한다. 결국 폭발한 남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고향을) 그리워하는 것이 아니오. 돌아가셨소. 이 앵무새는 더 이상 앵무새가 아니오! 존재함을 그만두었소! 수명이 만료돼서 그 창조주를 만나러 갔소! 고(故) 앵무새라고! 뻣뻣하게 굳어서! 삶을 상실하고 영면에 든 앵무새라고! 당신이 횃대에 못으로 박아놓지 않았다면 벌써 데이지꽃 옆에 누워있었을 거라고! 삶이라는 연극의 막을 내리고는 빌어먹을 보이지 않는 성가대에 들어갔다고! 이건 이제 전(前) 앵무새요! 앵무새였던 거라고!"

이 '죽은 앵무새' 콩트는 특히 영국과 미국에서 크게 유행했다. '죽은 앵무새'는 '말이 안 되는 억지 주장'을 뜻하는 말로 퍼져나갔다.

급기야 정치권에서까지 회자됐다. 1990년 영국 보수당 콘퍼런스에서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는 연설 끝부분에 라이벌 정당인 영국 자유민주당의 상징인 비둘기를 가리켜 "이 새는 앵무새였던 것입니다."(This is an EX_PARROT.)라고 말한 바 있다. 이후 보수당이 1997년 영국 총선에서 최악의 패배를 하자, 이듬해 영국 일간 <더 선>은 보수당을 풍자하는 다음과 같은 헤드라인을 1면에 걸었다.

"이 정당(政黨)은 더이상 정당이 아니오... 존재하는 것을 그만두었소... 이것은 전(前)-당이오, 당이었던 거라고."

이를 기념해 런던 포터 필드 공원에는 15미터 크기의 거대한 죽은 앵무새 모형이 설치되기도 했다. <필로겔로스> 류의 유머가 비록 '죽은 앵무새'와 직접적인 연관은 없다고 할 수 있겠으나, 이 책에 소개된 유머의 정서는 수천년에 걸쳐 유럽식 대화 문화-대중 문화-지성 세계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음을 짐작 가능한 부분이다.
▲'죽은 앵무새' 농담의 원형이 고대 그리스의 농담집 <필로겔로스>에 있음을 알린 BBC 보도. ⓒBBC

<필로겔로스>는 이미 서구권에는 여러 차례 번역되었다. 단순한 과거의 유산만도 아니다. 2008년 미국 존스 홉킨스 대학의 고전문학 교수 윌리엄 버그(William Berg)가 <필로겔로스>를 번역 출간한 후, 영국 코미디언 짐 보웬은 이를 바탕으로 스탠드업 코미디 공연을 열기도 했다. 시대를 초월한 농담집으로서 책이 가지는 가치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굳이 <필로겔로스>의 주인공을 꼽자면 고대 그리스의 '헛똑똑이'를 지칭하는 '스콜라스티코이'(Σχολαστικοί)다. 대체로 동서고금의 농담에서 주요 소재가 되는 이는 상대적으로 멍청한 이들인 반면, 고대 그리스에서는 부유하고 많은 교육을 받은 이가 주로 조롱의 대상이 됐다.

책을 번역한 이이자, 일인 출판사 마름쇠의 대표인 최원택 역자는 이를 두고 <필로겔로스>의 정서에는 "우리의 탈춤과 통하는 면"이 있다고 강조한다. 나아가서는 주류 기득권을 가진 이들이 온라인 상에서 총체적으로 비웃음의 대상이 되는 현 시대상과도 관련이 있는 부분으로 해석된다.

<필로겔로스>의 한국어 번역판은 단순히 옛 농담을 번역해 소개하는 데서 그치지 않았다. 고대 그리스와 고대 로마의 시대상을 알아야만 이해할 수 있는 농담의 맥락이 있다는 점을 고려해 원서에는 없는, 당시 시대상과 생활상을 보여주는 해설이 추가됐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 식문화에서 올리브와 포도주가 갖는 위치, 그리스의 전성기와 로마의 전성기 시절 유통된 은화의 가치 등이 충실한 설명으로 독자에게 안내된다.

<필로겔로스>를 엮은 알렉산드리아의 히에로클로스는 서기 5세기 초 신플라톤주의 철학자로 활약한 역사적 인물이다. 그는 고향인 알렉산드리아에서 쫓겨나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강제 이주당했는데, 이곳에서도 권력자의 심기를 거슬러 또 다시 유배형을 받았다. 그는 이후 유배를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와 제자들을 양성하는 한편, 여러 책을 집필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그가 <필로겔로스>를 엮었으리라는 게 그간 역사학계의 주류적 의견이었다.

다만 최근에는 이 '히에로클로스'가 5세기의 철학자가 아닌, 서기 2세기에 활약한 스토아 철학자 히에로클로스라는 주장도 나온다.

<필로겔로스> 한국어판은 전자책으로 출간됐다. 출판사는 '농담집'의 특성에 맞게 스마트폰이나 스마트PC, PC에서 독자가 간편하고 자유롭게 읽을 수 있게끔 전자책 출판을 결정했다고 밝혔다. 전자책의 장점을 살려 한국어와 함께 그리스 원문과 영어 번역문도 함께 실었다. 책을 음성으로 읽어주는 TTS 기능을 통해 귀로도 들을 수 있다.

▲<필로겔로스>(알렉산드리아의 히에로클로스 엮음, 최원택 옮김) ⓒ마름쇠

[이대희 기자(eday@press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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