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유대인의 새로운 예루살렘
행상·잡화상부터 시작해 미국 경제 붐 타고 구리왕·광산왕·신문왕 탄생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인도로 가는 신항로를 찾겠다고 출항한 1492년 스페인에서는 또 다른 무리의 사람들이 대대적으로 떠나고 있었다. 유대인이었다.
콜럼버스의 출항이 아메리카 신대륙 발견으로 이어지던 그해는 이베리아반도 지역을 이슬람에서 기독교 세계로 회복하는 레콩키스타가 완료된 해다. 레콩키스타 과정에서 기독교 세력은 유대인의 개종을 강요하다가 결국 대대적인 추방령을 내렸다. 추방령으로 내몰린 유대인에게는 전환과 기회였다.
남미, 서인도제도 거쳐 북미로…
신대륙을 발견한 스페인은 중남미 지역에서 적극적인 식민화 정책을 수행했지만, 그 이주 대열에서 유대인은 배제됐다. 기독교로 개종한 콘베르소나 겉으로만 개종한 마라노는 스페인 관리나 선장에게 뇌물을 제공하며 기회의 땅 신대륙으로 향했다. 특히 1580년 스페인 왕조가 포르투갈까지 통치하자 포르투갈 유대인 약 5천 명이 신대륙으로 떠났다. 1630년대에는 스페인령 아메리카의 거의 모든 마을에 유대인이 산재하게 됐다.
이들은 지중해 무역에서 큰 몫을 차지하던 유럽의 콘베르소와 연계해 대서양 교역에 종사하거나, 남미 은광의 관리 혹은 식민지 관리로서 활동했다. 유럽 본토에서 거세진 가톨릭교회의 이단 척결 종교재판 선풍은 스페인의 해외령에도 몰아쳤다. 유대인은 종교적 관용을 보장하는 네덜란드와 영국의 아메리카령인 북미로 발걸음을 옮기게 된다.
1654년 2월 포르투갈령 브라질 동북부의 중심 항구 헤시피에서는 유대인 난민을 태운 네덜란드 범선이 출범했다. 이 범선에 몸을 실은 유대인은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네덜란드의 북미 본토 식민지 전진 기지인 뉴암스테르담에 도착했다. 현재의 뉴욕 맨해튼이다. 유대인 23명이 약속한 뱃삯을 치르지 못해 유치됐다. 뉴암스테르담을 관할하는 총독은 고리대금업과 사기적인 교역에 종사하는 유대인을 추방하겠다고 네덜란드의 서인도회사에 청원했다. 하지만 서인도회사의 유대인 주주들은 이들이 잔류할 수 있도록 회사에 조처했다.
이는 유대인에게는 ‘새로운 예루살렘’인 뉴욕에서의 시작이었다. 17세기 들어 대서양 무역의 패권이 영국으로 넘어가면서 1667년 영국 점령으로 뉴암스테르담이 뉴욕으로 바뀌자, 뉴욕은 곧 유대인의 북미 대륙 출입구가 됐다.
영국의 1740년 공통귀화법에 따라서 대부분 유대인은 영국 시민으로 귀화해, 거주·교역·종교 등에서 동등한 권리를 누렸고 곧 공직과 군에서도 복무하게 됐다. 독립이 선언된 1776년 미국에는 유대인이 2천여 명 거주했다. 뉴욕은 유대인의 최대 거주지로 유대인들은 모피 교역상, 토지거래자, 농장주, 노예상, 해운업자로 번성하기 시작했다.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거주와 교역을 하고 집을 살 수 있었다. 심지어 식민지 지방선거에서 투표권도 행사했다.
독립이 선포되던 18세기 후반 미국은 유대인에게 가장 자유로운 곳이었다. 독립전쟁이 벌어지자 유대인 200여 명이 혁명군에 복무했는데 특유의 재능을 발휘해 승리에 큰 공헌을 했다. 상선을 보유한 아이작 모지스와 에런 로페즈는 영국의 해상 봉쇄를 뚫고 물자를 조달했다. 채권중개상 차임 살로몬은 전비 조달에 크게 기여했다.
대선 후보 낳은 잡화점, 의류 재벌 리바이스
18세기 중반까지 북미 본토를 비롯한 신세계 전역에서 유대인은 모두 세파르디계였다. 대부분 기독교 개종자이기도 했던 이들은 차별과 억압이 없는 미국에 자연스럽게 동화돼갔다. 유대인 정체성을 희석하는 세파르디 유대인을 대신해서 새로운 유대인이 18세기 중반 이후 북미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북미 본토의 영국령 식민지가 경제적인 비중을 키우자 구대륙에서 일반 이주민이 들어왔다. 특히 독일에서 이주자가 들어왔는데 그중에는 독일계 유대인 포함됐다. 미혼의 젊은 남성 유대인이 단신으로 미국에 가서 자리를 잡으면 곧 가족이나 친지를 불러오는 것이 당시 독일계 유대인의 미국 이주 형태였다. 유대인 한 명이 10명 이상의 유대인을 미국으로 불러들이는 효과로 이어졌다. 1820년 약 3400명의 유대인이 미국에 정착했다. 1840년 1만5천 명, 1850년에는 5만 명으로 늘었다. 1848년부터 1860년까지 미국 이주자 230만 명 중 10만 명이 유대인이었다. 1858년 뉴욕에서 유대인 인구는 1만7천 명이 됐다.
중부 내륙의 물류 중심이 된 신시내티에서 유대인 인구는 1860년 1만 명을 넘어섰다. 당시 미국으로 이주한 독일계 유대인은 유럽에서처럼 행상과 잡화상으로 주로 일했다. 특히 독일계 이주민에게 필요한 잡화를 조달하면서, 그들과 함께 내륙으로 이주 동선을 같이했다. 유대인 행상은 미국 건국 초기 ‘양키’라 불린 북부 장사꾼을 대체했다. 1860년께 미국 전역에는 약 1만5천 명의 유대인 행상이 누비고 있었다.
유대인 이민자는 마차를 끄는 행상에서 작은 잡화상 주인으로, 그리고 도매상으로 성장했다. 더 나아가 의류 제조업자로 성장했다. 유대인은 유럽에서의 역사적인 사회경제적 역할을 미국에서도 그대로 재현해나갔다.
애리조나의 마이클 골드와서는 조그마한 잡화상을 서부에 주둔하는 군기지들의 주요 보급센터로 키웠다. 애리조나의 최대 백화점 체인으로 성장했다. 그의 손자가 1960년대 공화당 대선 후보까지 나섰던 유명한 보수정치인 배리 골드워터 상원의원이다. 청바지로 유명한 의류 재벌 리바이스는 1850년대 레비 스트라우스가 캘리포니아의 골드러시에 몰려든 노동자를 대상으로 작업복 등을 팔면서 만든 기업이다.
남북전쟁이 발발하자 유대인은 자신들이 소속된 북부와 남부의 대의에 충실했다. 모두 8600명의 유대인이 종군했고, 이 중 6천여 명이 북군에 참가했다. 하지만 전쟁이 부른 국가주의와 민족주의 속에 반유대주의가 극성을 부렸다. 북군 사령관 율리시스 그랜트는 1862년 12월 북군 점령지인 테네시, 미시시피, 켄터키에서 유대인 추방령을 내렸다. 유대인이 면화 투기를 한다는 이유였다. 점령지로 몰려들어서 한몫 잡으려는 북부 뜨내기들 사이에 유대인도 끼어 있었지만, 그들만 특정해서 추방령을 내린 것은 분명 차별적 처사였다. 이 명령은 에이브러햄 링컨 당시 대통령이 취소했지만, 미국이라고 반유대주의의 예외는 아님을 말해줬다.
금융·도소매·백화점·의류·가구 산업 주도
남북전쟁이 끝난 뒤 미국은 금박시대라는 질풍노도의 경제 붐 시대가 도래했다. 유대인의 사회경제적 진출도 가속했다. 1889년 미국 인구조사를 보면, 유대인 가구는 1만8천 가구였다. 남성의 50%가 상인이었고, 20%는 회계원이나 사무원이었다. 2%가 은행가, 중개인, 회사 중역이었다. 5%는 전문직업인이었다. 행상은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미국에서 유대인이 두각을 드러낸 산업 분야는 유럽과 마찬가지였다. 금융, 도소매, 백화점, 의류, 가구 등의 산업을 유대인이 주도했다. 특히 주요 도시 백화점은 유대인이 개척하고 독점했다. 최대 도시 뉴욕의 백화점은 모두 유대인이 운영했다. 래저러스 스트라우스 가문이 창업한 메이시는 세계 최대 백화점 체인이 됐다.
1837년 미국에 이민한 조지프 셀리그먼은 행상으로 출발해서 펜실베이니아 랭커스터에서 잡화점을 창업하고 대부업을 겸하며 투자은행가로 성장했다. 남북전쟁이 일어나자 전쟁 채권 매매에 종사했다. 채권 인수는 이 가문의 특화 사업이 됐고, 전쟁 뒤 셀리그먼&컴퍼니는 미국 제일의 채권 인수 회사가 됐다. 리먼 브러더스, 골드먼 삭스&컴퍼니, 살로몬 브러더스, ‘쿤, 로브&컴퍼니’, 줄스 바크&컴퍼니, 라덴버그 탈먼&컴퍼니 등 다른 유대인 투자은행가들도 비슷한 궤적을 걸었다.
유럽의 철도 등 대형 사회기반시설이 유대인 투자은행가의 자본 조달에 의지한 것처럼 미국에서도 유대인 투자은행가가 철도 건설 자본을 조달했다. 제이컵 시프가 대표적이다. 쿤, 로브&컴퍼니의 동업자인 솔로몬 로브의 먼 친척인 시프는 젊은 시절 미국에 이민해 그 회사 간부가 됐다. 로브의 딸과 결혼한 뒤 동업자 지위에 오른 시프는 회사를 철도 채권을 인수하는 최대 은행으로 성장시켰다. 이 회사는 또 미국 제조업의 상징이 되는 웨스팅하우스, 에이티앤티(AT&T)의 채권 발행과 인수를 담당했다. 20세기 초 월가에서 쿤, 로브&컴퍼니는 최대 유대인 은행이 됐고, 시프는 미국 유대인 사회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인물로 성장했다.
난로를 청소하는 구리철사 브러시 행상으로 출발해 미국 ‘구리왕’이 된 아돌프 루이손, 난로 청소부로 시작해 미국뿐만 아니라 멕시코, 칠레 등의 광산 개발로 ‘광산왕’이 된 마이어 구게하임 등도 유대인 사업가를 대표했다. 특히 미국의 3대 부자에 오른 구겐하임은 문화예술계 최대 거물이 됐다. 퓰리처상으로 유명한 조지프 퓰리처도 헝가리 출신 유대인이다. 세인트루이스의 독일어 신문 기자로 출발해, 신문사들의 인수·합병을 통해 ‘신문왕’으로 등극했다.
19세기 말 주요 산업 상층부, 전문직 중산층
19세기 말이 되면 미국 주요 산업의 상층부에 유대인이 포진했고 중산층에 올라선 유대인은 법률·금융·회계·학문·언론·문화예술 분야 전문직으로 활발히 진출했다. 하지만 유대인의 미국 정착은 끝나지 않았다. 19세기 말부터 러시아와 동유럽에서 일어난 유대인 박해인 포그롬으로 동유럽 유대인이 미국에 대대적으로 밀고 들어왔다.
뉴욕의 유대인 의류 제조업은 동유럽 유대인의 첫 관문이었다. 뉴욕 항구에 도착하는 동유럽 유대인 이민자는 배에서 내리자마자 공장으로 직행해 일자리와 숙식을 해결했다. 유대인은 유럽에서 전통적으로 가내수공업에 종사해 손재주와 노동 규율이 좋았다. 유대인 이민자도 뉴욕의 의류업을 첫 관문으로 하여 미국 사회에 정착하고 다른 지역으로 진출했다.
동유럽 유대인의 가세로 미국 유대인 인구는 20세기 초를 지나면서 대번에 500만 명으로 늘었다. 미국 사회의 최하층부에 일단 포진한 이들은 매춘과 갱단부터 공장에서 사회주의 노동운동의 중추 구실까지 맡았다. 미국은 유대인에게 새로운 조국이 됐고, 유대인은 미국을 더욱 발전시키는 효소 같은 역할을 했다.
정의길 <한겨레> 선임기자 Eg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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