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상] 日 박물관의 ‘일본인 손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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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화봉을 든 백발노인이 경기장으로 들어왔다. 가슴에는 태극 휘장과 오륜(五輪) 마크를 달았다. 덩실덩실 춤추는 듯 세상을 향해 손을 흔들면서 펄쩍펄쩍 뛰었다. 수만 관중이 일제히 기립했다. 들어서는 순간 누구나 그가 누군지 알았다. 역사적 의미도 알았다. 성화를 들고 서울올림픽 개막식장을 달리는 태극 마크의 손기정. 그를 향해 박수를 쏟아낸 관중 속에 다케시타 노보루 일본 총리도 있었다.
▶개막식이 열린 1988년 9월 17일. 일본은 긴장했다. 한국의 관중들이 일장기를 든 선수단에게 야유를 퍼붓지 않을까. 당시 니혼게이자이신문의 한 대목이다. “한국인에게 과거의 불행한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일본 국기지만, 국기를 들고 일본 선수단이 입장했을 때 경기장은 박수로 끓어올랐다. 일본 선수단은 한국의 국화(國花) 무궁화를 들고 있었다. 관중을 향해 무궁화를 흔들었다.” 요미우리신문은 일본 선수단 기수(旗手)의 말을 이렇게 전했다. “굵은 눈물이 쏟아졌다. 한 바퀴 행진은 너무 짧았다. 더 걷고 싶었다.”
▶손기정은 원래 최종 주자였다. 비밀이 새 나가 개막식 직전에 외신에 보도됐다. 조직위는 막판에 최종주자를 미래 세대로 바꾸기로 결단했다. 경기장에 들어와 끝까지 달릴 줄 알았던 손기정은 다음 주자에게 성화봉을 넘겼다. 열아홉 육상 선수 임춘애였다. 두 주자의 나이 차는 57년. 그 순간 경기장을 가득 채운 과거의 감격이 미래의 희망으로 승화됐다. 더 큰 박수와 환호가 터졌다. 이 선택이 서울올림픽 개막식을 역대 최고 올림픽 개막식 중 하나로 만들었다.
▶최근 일본 올림픽 박물관이 ‘역대 일본인 금메달리스트’ 전시장에 손기정 선수 사진을 상단에 배치했다고 한다. 손기정이 월계관을 쓰고 1936년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경기 시상대에 선 사진이다. 그때 심훈은 사진을 보고 시를 썼다. ‘오오, 나는 외치고 싶다. 마이크를 쥐고/ 전 세계의 인류를 향해서 외치고 싶다!/ 인제도 인제도 너희들은/ 우리를 약한 족속이라고 부를 터이냐!’(’오오, 조선의 남아여!’) 하지만 손기정의 가슴엔 커다란 일장기가 그려져 있었다. 아래로 향한 그의 눈은 월계관 그늘에 가려졌다. “세상에서 가장 슬픈 올림픽 시상식”으로 불리는, 바로 그 순간이다.
▶일본은 지금 올림픽을 치르려는 나라다. 올림픽은 세계인의 축제다. 그런데 일본이 올림픽 홈페이지 일본 지도에 독도를 굳이 넣고, 손기정을 일본 선수로 전시해 이웃 나라의 상처를 들쑤신다. 코로나 사태로 1년 연기된 올림픽이다. 그러지 않아도 일본의 방역 문제로 경기를 제대로 열 수 있을지도 의문인 상황이다. 그래도 많은 한국민은 일본 올림픽이 열리고 선수들이 펼치는 드라마를 기다리고 있다. 일본은 그런 기대에 찬물을 끼얹고 있다. 한일 외교 갈등 격화엔 한국 정권이 책임져야 할 부분이 분명히 있지만, 일본의 이런 치졸한 행태를 보면 혀를 차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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