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대부분은 主役 아닌 코르 드 발레"

이태훈 기자 2021. 6. 19.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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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쩌다 그만두지 않았을까
정옥희 지음 | 엘도라도 | 268쪽 | 1만4800원

“정옥희씨는 오늘이 우리와 마지막 날이었습니다. 이제 대학원에 진학한다고 하네요. 다들 박수 보내주세요.”

두 달간의 ‘호두까기 인형’ 공연 마지막날, 발레단 단장이 단원들을 모아놓고 감사 인사를 마친 뒤 말했다. 쏟아지는 박수가 어색했다. 의상과 소품을 조심스레 벗어 반납하고 화장을 지웠다. 은퇴 회견과 기념 공연은 프리마 발레리나들만의 특권. 군무 무용수 ‘코르 드 발레’의 은퇴는 대개 이렇다. 초등학교 1학년 때 부산 광안리 해변 상가 4층 학원에서 시작된 발레 소녀의 길은, 이 날 ‘무용 연구자’의 그것으로 바뀌었다.

“발레단의 무용수는 노동자다. 그 중에서도 코르 드 발레는 성실하고 근면한 노동자다. 코르 드 발레로 은퇴했기에 나는 조금 더 성숙한 관찰자가 되었다. 내가 주인공이 아니었기에 좀 더 낮은 곳, 가려진 곳, 침묵하는 곳에 눈길이 갔다.” 그리고 저자는 말한다. “우리 대부분은 코르 드 발레이고, 꾸준히 자리를 지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잘 알고 있다.”

꾸준히 자리를 지키는 것이 가장 힘들다

저자는 유니버설발레단 발레리나 출신의 무용 연구자. 공연계에선 해박한 무용사 지식과 미문(美文)으로 이미 이름이 알려졌다. 대학에서 가르치며 공연 해설을 쓰고 전문지와 일간지에 글을 기고한다. 무용가 중엔 달변가가 드물다는데, 이 책의 언어는 섬세하고 매혹적이다. 몸의 언어, 그 섬세함에 매혹당한 사람들이 무용수가 되는 것이겠으나, 그걸 펜끝으로 종이 위로 옮겨오는 것은 전혀 다른 영역이라 놀라게 된다.

예를 들어 저자는 오랫동안 자신을 가리키는 말이었던 ‘발레리나’에 대해 “오븐에서 갓 꺼낸 수플레처럼 한껏 부풀어오른 단어”라고 말한다. 핑크빛 발레 슈즈와 팔랑이는 나비 날개 같은 튀튀, 빛나는 왕관과 보석 장식을 두른 가냘픈 여성 같은 고정관념을 향한 ‘셀프 디스’다.

오히려 ‘발레리나’라는 단어는 그에게 “땀에 절어 소금이 더께 앉은 레오타드, 발가락을 종이 테이프로 칭칭 감고 물집을 터트리고 달래듯 주무르던 손, 파스 냄새와 땀 냄새가 후텁지근하게 배어 있는 탈의실, 자기 한계와 단점을 절감하면서도 한 번 더 노력해보던 마음 같은 것을 떠올리게 한다”고 말한다.

일상을 구도하듯… ‘발레리나’의 삶이란

그러니 이 책의 섬세함과 매혹은 유미주의적 취미나 심미적 허영이 아니다. 오히려 구도하듯 살아가는 무용수의 일상 안팎의 웃음, 땀, 눈물 같은 것들로부터 온다. 발레리나의 그 마음은 최선을 다해 일상의 쳇바퀴를 돌리는 보통 사람들의 마음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평범한 집안에서 발레를 전공하느라 일찍부터 철들었고 쓰라린 적도 많았지만 저자는 그 덕에 세상의 작은 이치를 배웠다고 말한다. “뭐든 주변부는 시끄럽고 번잡스럽지만 중심은 고요하고 정갈하게 남아 있다”는 진리다.

무용사에 대한 저자의 해박함에 기대어 무대 안팎의 사소한 지식을 얻는 재미도 쏠쏠하다. 20세기의 많은 전설적 발레 무용수들은 요즘 아이돌들이 예명을 짓듯 러시아 귀족풍의 이름으로 개명해 활동했다. 전설적 발레리나 ‘마고 폰테인’은 원래 후줄근한 잉글랜드 시골 마을을 떠올리게 하는 촌스러운 이름 ‘페기 후컴’이었다.

저자는 올해 초 펴낸 첫 책 ‘이 춤의 운명은’에서 박제된 명작이 아니라 저마다 제각각 목숨을 살아나가는 춤들의 생애사를 사근사근 설명했다. 어쩌면 이 책은 춤에 관한 연구에 가닿기까지 마음의 흐름을 담은 일종의 ‘프리퀄’일 수도 있겠다.

책장을 덮으면 발레 무대가 다시 그리워진다. 앞으로도 겉으로 드러난 화려함에 먼저 감탄하는 버릇을 버리진 못할 것이다. 하지만 그 뒤에 숨은 무용수들의 땀, 눈물, 숨소리 같은 것에 더 마음이 쓰일 것 같다. 고단하게 하루 하루를 버티며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의 삶에 대해 그러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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