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마중 나오는 어른들

김지은 서울예대 문예학부 교수·아동문학평론가 2021. 6. 19.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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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달랑달랑 달랑 바둑이방울 잘도 울린다”로 시작하는 동요 ‘바둑이 방울’은 학교에서 돌아오는 어린이가 자신을 마중 나온 강아지를 만나 느낀 반가움을 담은 노래다. 1980년대에 발표되었지만 아직도 애창동요다. 이 노래의 1절에 비해 2절은 덜 알려져 있는데 2절에서 집에 돌아오는 주체는 어린이가 아니라 강아지다. “대문 삐걱 열어 주면은 제가 먼저 달음질쳐 들어온다”에서 집에 돌아오는 건 강아지이고 그때 울리는 바둑이방울은 “내가 왔다”는 강아지의 신호다. 외출에서 당당히 돌아오는 강아지의 모습은 상상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진다. 이 노래를 부르면서 어린이는 강아지를 다정하게 마중 나가고 무거운 대문을 열어주는 일이 마중을 받는 일만큼이나 행복하다는 걸 느낀다.

김지은 서울예대 문예학부 교수·아동문학평론가

이 노래의 1절에서 반갑다고 꼬리치며 따라오는 강아지로부터 아이가 환대받는 경험과 2절의 강아지를 환대하는 경험은 연결되어 있다. 1절의 기쁨이 2절의 환대를 자청하게 만든다. 노래의 또 다른 매력은 아이가 2절에서 반갑게 맞이하는 존재가 자신처럼 조그만 강아지라는 것이다. 만약에 퇴근하는 아버지를 마중 나가서 배꼽 인사를 올리는 것이 2절의 전개였다면, 40년 넘게 어린이의 사랑을 받는 명곡이 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바둑이 방울’을 작사, 작곡한 김규환님의 또 다른 곡 중에 ‘그림’이라는 노래가 있다. 오래전 동요대회 같은 곳에서 종종 불린 애잔한 명곡이다. 이 곡은 동생이 야단맞는 장면을 목격한 언니가 동생의 마음을 헤아려보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노래 속의 동생은 집에서 신나게 그림을 그리고 있었는데 그 장면을 본 어른에게 물감을 뿜으면서 장난한다고 호되게 혼난다. 어른들의 눈에는 그림에 몰두한 어린이의 마음은 안 보이고 잔뜩 어지럽힌 집안의 풍경만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같은 또래인 언니에게는 동생이 보인다. 그림 그리기에 열중하며 반짝반짝 빛나던 동생의 두 눈이 자꾸 떠오른다. 가단조로 된 이 노래의 쓸쓸한 멜로디에는 어린이의 서투름을 이해하지 못하는 세계에 대한 어린이의 항변이 담겨 있다.

다행스러운 것은 노래의 마지막 소절에서 상냥한 선생님이 한 분 나온다는 것이다. 이튿날 1학년 게시판에는 동생이 어제 그린 그림이 걸려 있고 칭찬해주는 선생님을 보면서 언니는 조금 마음을 놓는다. 한 사람이라도 우리 마음을 알아준다는 안도감이었을 것이다. 이처럼 어린이는 이해받은 경험을 통해 이해하는 감정을 배운다. 동화는 수많은 몰이해를 뚫고 만들어내는, 약자를 마중 나오는 세계에 대한 활자화된 증거다. “책에서 만난 사람들은 나를 반겨주었어”라는 경험은 자라는 어린이를 조금 더 안심하게 한다. 자신도 세상의 규칙을 더 열심히 따르고 싶게 만든다. 하지만 책과 노래 밖에서 만난 실제 어른들이 다짜고짜 화만 내고 있다면 책과 노래도 도리가 없다. 문학과 예술의 힘은 딱 거기까지다.

시선을 높은 곳에만 두고 사는 사람들에게 돌발 상황은 이해 불가능한 짜증의 연속이다. 사극을 보면 가마에 올라탄 양반이 가장 많이 하는 말이 “길을 비켜라!”이다. 시야에 들어오지 않는 존재가 동일한 공간에서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거추장스럽게 여겨지는 것이다. ‘민식이법’으로 알려진 어린이의 보행권을 보호하기 위한 법적 노력은 가마 위에서 떨어지는 불벼락으로부터 학교에 오가는 어린이의 생명을 보장하기 위한 최소한의 사회적 합의다. 어린이였을 때, 차가 다니는 큰길을 건너야 하는 일이 얼마나 두려운 일이었는지는 누구나 기억해낼 수 있을 것이다. 용기를 내어 외출한 어린이의 방울 소리에 귀 기울이면서 부디 학교 앞에서는 속도를 줄이기 바란다. 어린이를 마중 나오고, 조심하고, 먼저 주의할 수 있는 것도 당신에게 힘이 있어서 가능한 일이다. 권력은 갖고 싶고 주의는 기울이지 않겠다면, 희생자는 결국 어린이가 될 것이다.

김지은 서울예대 문예학부 교수·아동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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