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 서태후, 연합군 몰래 의화단에 "서양 귀신 박멸" 지시
미 대통령 "화해 주선하겠다" 화답
연합국 대표들, 중에 배상금 요구
당시 중 정부 1년 재정 수입의 5배
미, 금액 줄이려 노력했으나 허사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81〉
연합군 신무기에 무너진 의화단
부적과 화승총, 대도(大刀)로 무장한 의화단의 용맹은 한계가 있었다. 연합군 신무기에 나가떨어졌다. 다급해진 청나라 정부가 해외공관에 지시했다. “주재국 정부와 사태를 완화시킬 방법을 모색해라.” 주미공사 우팅팡(伍廷芳·오정방)은 노련한 외교관이었다. 태후에게 전문을 보냈다. “미국이 문호개방 정책을 제창했다. 호응해야 황실이 안전하다. 의화단은 반란조직이다. 때가 되면 정부의 소탕 대상이다. 하늘이 준 기회다. 이참에 이이제이(以(夷制夷), 서양 귀신 이용해 제압해 버리자.” 즈시는 회의를 소집했다. 연일 결론 없는 회의가 계속됐다. 참석자들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측근이라는 것들이 제일 먼저 도망치자 즈시는 당황했다. 미국에 도움을 청하기로 작정했다. 제 손으로 유폐시킨 황제(光緖帝)를 불렀다. “누가 뭐래도 중국 황제는 너다. 미국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내라.” 변복으로 홍등가 출입하다 들키고, 개혁가들 꼬임에 빠져 엉뚱한 짓 하다 자유를 잃었어도 걱정은 태후나 마찬가지였다.
어릴 때부터 당대의 대가들에게 교육받은 광시제는 명문장가였다. 7월 17일 밤, 미국 25대 대통령 매킨리에게 보내는 서신을 직접 작성했다. “중국은 미국과 장기간 우호 관계 유지하며 미국의 최종 목적이 국제무역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간 중·미 쌍방은 일방적으로 상대를 불신임하지 않았다. 최근 중국인과 기독교 전도사 간의 증오가 폭발, 열강이 조정(朝廷)의 입장에 회의(懷疑)를 품기 시작했다. 선교를 마땅치 않게 여기는 중국인의 행동을 정부가 지지한다는 근거 없는 의심으로 재난에 가까운 군사 충돌이 임박했다. 목전의 곤경을 해결하기 위해 중국은 귀국에 무한한 신뢰를 표한다. 각하의 지혜로운 결정에 각국이 협조해 질서 회복과 평화 창출에 노력하기를 희망한다. 회답을 간곡히 청한다.”
당시 베이징은 난장판이었다. 무선 통신이 불가능했다. 광시제는 준마(駿馬)를 동원했다. 산둥(山東)에 있는 위안스카이(袁世凱·원세개)에게 서신을 보냈다. 산둥과 상하이는 무선망이 살아있었다. 위안은 황제의 서신을 직접 상하이 지방장관(道臺)에게 타전했다. 주미공사 우팅팡은 상하이 도대가 보낸 황제의 서신을 매킨리에게 전달했다.
중, 5년 뒤 배상금 일부 돌려받아
미국은 중국의 이익을 제대로 대변하지 못했다. 담판장에서 리훙장과 마주한 연합국 대표들은 중국에 백은 4억5천만냥을 요구했다. 정부의 1년 재정 수입이 9천만냥일 때였다. 존 헤이의 훈령을 받은 미국 대표는 2억냥으로 줄이기 위해 노력했지만 허사였다. 리훙장은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8개국이 합의한 문서에 서명했다. 3일간 피를 토하다 세상을 떠났다. 미국 대통령 매킨리도 서명 하루 전날 무정부주의자의 저격을 받고 숨졌다.
5년 후, 주미공사 량청(梁誠·양성)이 미국에 배상금 반환을 요구했다. 량은 12세 때 관비 유학생으로 미국 땅을 밟았다. 예일대학 재학 중 정부시책 변덕으로 귀국, 외교계에 투신했다. 뉴욕타임스가 극찬할 정도로 영어에 능통하고 미국 사정에 밝았다. 발군의 협상력에 미국도 손을 들었다. 배상금 일부를 토해내겠다고 량에게 통보했다.
량청은 미국식 교육과 체육에 관심이 많았다. 반환될 배상금의 용처를 고심했다. 미국에 기상천외한 제안을 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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