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민호의문학의숨결을찾아] 시인 정지용의 '녹번리'를 찾아서
'국민보도연맹' 시절 불안감 담겨
지하철 3호선은 서울 은평구와 서대문구를 통과해서 중구 쪽으로 운행한다. 내가 사는 곳은 더 구석진 곳이지만, 불광역에서 3호선과 6호선이 만나기 때문에 갈아타고 ‘시내 쪽’으로 나아갈 수 있다.
오늘 나는 이 지하철 3호선 연변을 따라 줄지어 서 있는 동네 가운데 하나인 녹번동으로 향한다. 언제 한 번 가본다, 가본다 하고 미뤄 둔 곳의 하나, 나 사는 곳 바로 이 근방에 있는 시인 정지용의 ‘초당’ 자리를 살펴보려는 것이다.
정지용은 충청북도 옥천 사람이다. 일본에 유학 갔다 와서는 줄곧 서울에서 생활했을 것이다. 일제 말기에 부천 소사동으로 ‘소개(疏開)’를 갔다 돌아와서는 돈암동에 기거했고, 1948년에 곡절 많은 사연으로 모든 사회활동을 중단하고는 이 녹번동으로 여섯 칸짜리 초가를 짓고 옮겨와 6·25 전쟁통에 ‘납북’되기까지 살았다.
집에서 출발한 지 불과 10분도 안 되어 나는 어느 골목으로 접어들어 ‘정지용길’이라고 쓴 표지판을 만난다. 여기서 도배·장판 집을 앞두고 더 좁은 골목으로 꺾어지면 바로 정지용 ‘초당’ 터를 만날 수 있다. 지금 서울시 은평구 녹번동 126-10번지로 되어 있으나 옛날에는 필시 서대문구에 속하는 녹번리였을 것이다.
지금은 빌라 건물이 들어선 이 자리에 ‘정지용 초당 터’를 알리는 표지판이 붙여져 있다. 여기서 나는 그가 1950년 1월에 ‘새한민보’라는 ‘순간지’에 발표한 시 ‘녹번리’를 읽는다. 이 시는 이순욱이라는 연구자가 발굴한 것으로 그는 ‘국민보도연맹’ 시절의 정지용의 불안한 심리가 이 시에 투영돼 있다고 했다.
녹번리의 ‘녹번’은 한자가 어렵다. 녹(碌)은 ‘푸른돌 녹’이요, 돌의 푸른빛을 가리키기도 하며, 번(磻)은 ‘강이름 번’이다. 은평구청에 소개된 지명 유래를 보면, 이 녹번 고개 부근이 “자연동(自然銅)의 일종으로 푸른빛을 띠는 광물질인 산골(山骨)이 많이 나오는 곳으로 유명했다”고도 하고 “숲이 우거져 소름이 끼칠 만큼 무서운 지대였으므로 녹번현이란 이름이 붙여진 것”이라고도 한다.
이 ‘산골’은 박완서 소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에 나오는데, 어머니가 아프자 소녀 박완서의 오빠가 산에 가서 이 산골을 구해다 드실 수 있도록 했다. 그런데 그보다 나는 오늘은 이 녹번이 숲이 우거져 무서움을 주는 곳이었다는 데 신경이 더 쓰인다.
푸른 동이 나는 녹번, ‘헐려 뚫린 고개’ 무악재 너머 녹번리에서 정지용은 초가집을 짓고 ‘숨어’ 산다. 하지만 남북한에 단독정부가 들어선 이후 불어닥친 ‘반공 바람’은 그를 보도연맹 행사에 자주 불러냈다.
이 시 ‘녹번리’는 읽을수록 깊은 맛이 난다. 마지막 연에서 화자는 “인생 한 번 가고 못 오면 / 만수장림(萬樹長林)에 운무(雲霧)로다”라고 ‘탄식’을 한다. 깊고 깊은 산 숲 속에 안개 가득한 처지, 정지용은 교수도 주필도 그만두고 들어앉은 자신의 삶을 깊은 ‘안개산’ 속을 통과하는 것처럼 여겼다.
나는 그 심사가 무엇인지 알 것 같다고 생각하며, 오늘은 정치와 거리가 먼, 낮고 착한 사람들 살아가는 연신내 연서시장 바닥으로, 책상 위에 올려놓을 작은 장미꽃 화분 하나를 구하러 발길을 돌린다.
방민호 서울대 교수·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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