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논단>6·25 때 더 생각나는 밴 플리트 장군

기자 2021. 6. 18.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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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기억해야 할 호국 영웅이 많지만, 제임스 A 밴 플리트 장군은 우리가 특별히 기억하고 추모해야 할 분이다.

밴 플리트 장군은 6·25전쟁 중 8군사령관 직을 수행한 4명의 미국 육군 장군 중 가장 오랜 기간(1951. 4∼1953. 2) 미8군과 유엔군의 지상 작전을 지휘했다.

밴 플리트 주니어도 미 웨스트포인트를 졸업한 뒤 폭격기 조종사로 6·25에 참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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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태오 前 수도군단장, 예비역 육군 중장

6월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기억해야 할 호국 영웅이 많지만, 제임스 A 밴 플리트 장군은 우리가 특별히 기억하고 추모해야 할 분이다.

밴 플리트 장군은 6·25전쟁 중 8군사령관 직을 수행한 4명의 미국 육군 장군 중 가장 오랜 기간(1951. 4∼1953. 2) 미8군과 유엔군의 지상 작전을 지휘했다. 그가 부임한 1951년 4월은 중공군의 1, 2차 춘계 공세로 세 번째 서울 피탈(被奪)이 위협받던 시기였다. 여차하면 서울을 다시 포기할 수도 있다는 지침이 있었지만, 장군은 400여 문의 야포를 광화문∼마포 일대에 집결시키고 화력을 집중해 마침내 적의 예봉을 꺾고 38선 북쪽으로 전선을 북상시킴으로써 휴전회담에 유리한 국면을 조성했다.

또, 그는 전쟁 중이었지만 조직적으로 전력을 증강시켜 대한민국 육군의 사단을 2배로 늘리고, 간부들을 미국으로 보내 선진 군사교육을 이수하도록 했다. 나아가, 미국 웨스트포인트(육군사관학교)의 학제를 본떠 한국에도 4년제 정규 육군사관학교를 만들었다. 휴전 이후 이승만 대통령이 미국 방문 당시 장군의 이러한 노고를 회상하며 ‘한국군의 아버지’라고 한 것은 과언이 아니다. 그는 군을 떠난 이후에도 ‘한국은 또 다른 조국’이라며 전후 복구와 경제 발전을 위해 헌신했다. 지금의 울산공업단지는 밴 플리트 장군이 주선한 AID 차관으로 만들어진 곳이다. 또한, 뉴욕에 ‘코리아소사이어티(Korea Society)’라는 단체를 만들어 한·미 양국의 경제·교육·문화 교류의 장으로 성장시켰다.

우리 국민이 밴 플리트 장군의 희생과 헌신에 특별히 감사와 경의를 표해야 할 일이 또 하나 있다. 장군의 외아들 밴 플리트 주니어에 관한 것이다. 밴 플리트 주니어도 미 웨스트포인트를 졸업한 뒤 폭격기 조종사로 6·25에 참전했다. 그런데 1952년 4월 4일 밤, 평양 북쪽의 순천 지역에 대한 공습 임무를 위해 출격했다가 북한 상공에서 그만 격추되고 말았다. 아군은 적지 후방에서 수색정찰을 했지만 그를 찾지 못했고, 수색은 곧 중지됐다. 밴 플리트 장군이 “내 자식을 찾는 일로 다른 장병들의 목숨을 위태롭게 해선 안 된다”고 명령했기 때문이다. 전사자로 처리된 밴 플리트 주니어는 격추된 뒤 북한군에 생포돼 북한을 거쳐 중국, 그리고 소련으로 이송돼 시베리아의 악명 높은 노동수용소(굴라크)에서 강제노역을 하다가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관련 증언이 있지만 북한이나 중국·소련은 이 사실을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다.

밴 플리트 장군은 아들에 대한 안타까운 사랑과 연민을 가지고 아들이 삶을 바친 대한민국의 수호와 발전에 헌신하다가 1992년, 100세로 영면했다. 이후 코리아소사이어티는 매년 한·미 우호 증진에 기여한 인사들을 선정해 ‘밴 플리트 상’을 수여하고 있다. 지난해에는 그룹 방탄소년단(BTS)이 수상했다. 그리고 뜻 있는 몇몇 인사가 모여 ‘밴플리트재단’을 만들고 그가 남긴 소중한 전쟁·외교 관련 문서의 디지털 아카이브를 구축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정전협정으로 포화가 멎은 지 채 70년도 안 돼 우리는 6·25전쟁에 관해 많은 것을 잊고 살아간다. 하지만 6·25는 국가와 국민이 지향해야 할 분명한 방향을 제시해 주고 있다. 그리고 “승리의 의지(The Will to Win)”를 외치며 전장을 누비던 밴 플리트 장군의 족적은 그 증거가 돼 영원히 우리 후손들에게 전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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