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해원의 말글 탐험] [144] 아낄 걸 아껴야지

양해원 글지기 대표 2021. 6. 18.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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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 내리자마자 뛰었다. 깜빡깜빡, 건널목 파란불이 채근한 탓이다. 지하철역 내려가는 자동계단도 가만 서 있기 어렵지. 승강장 앞둔 마지막 층계에서 띠리리링 소리가 들린다. 열차가 들어온다니 또 후다닥. 한숨 돌린 찻간에서 불현듯 한 생각이 든다. 기다리는 시간 좀 아껴본들 얼마나 된다고. 헛되지 않게 아낄 것은 말글살이에서나 챙겨야 할까 보다.

‘집단감염 때문에 긴장의 끈을 조금도 놓을 수 없는 상황.’ 굳이 끈을 놓느니 마느니 해야 할까. ‘긴장을 조금도 늦출 수 없다’ 한다고 뜻이 달라지거나 약해지지 않는다. 헛된 말로 글이 복잡해지고 읽는 시간만 늘어날 뿐. ‘부검 결과 등을 종합해 사인(死因) 규명에 나선다는 방침’도 마찬가지. 나서야만 의지가 두드러지거나 일이 풀리나. ‘사인을 밝힐 방침’ 말고 뭐가 더 필요하기에.

운동경기 중계 때 자주 듣는 표현이 있다. ‘이렇게 해서 한국이 결승 진출 티켓을 따게 됐습니다.’ 이미 이겨서 결승에 올랐는데, 어째서 ‘~게 됐다’ 하는지. 그것도 ‘진출 티켓’까지 거추장스럽게 붙여서. ‘이렇게 한국이 결승에 올랐습니다’ 하면 좋겠다.

‘전 직원을 대상으로 5년마다 유급휴가를 준다.’ ‘민간인을 상대로 학살을 저질렀다.’ 이렇듯 부질없이 쓰는 ‘대상/상대’를 흔히 볼 수 있다. 그냥 ‘전 직원에게’ ‘민간인을 학살했다’로 그만이다. ‘학살을 저질렀다’는 ‘학살했다’보다 한마디 더한 것 말고 다른 점을 찾기 어렵다.

아껴야 할 말은 ‘있다’ ‘없다’와 관련해서도 붙곤 한다. ‘대사와 외교관이 동시에 성범죄로 수사받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동창회 회칙에는 제명에 관한 규정이 존재하지 않는다.’ 줄여 보자. ‘수사받는 일은 처음이다.’ ‘규정이 없다.’ 그래도 말맛이 다르지 않으냐면 도리 없지만.

전철 갈아타는 통로에서 다시 잰걸음이 됐다. 좀 전 그 알량한 깨침은 어디 가고. 이런 조급증이면, 고작 2주일에 한 번인 졸고(拙稿)라도 미리미리 쓸 일이지. 또 마감 날이다.

글지기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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