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병준의 가타부타]아시아계 미국인을 향한 증오범죄

최병준 후마니타스연구소장·논설위원 2021. 6. 17. 2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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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미국은 마스크를 벗고 일상으로 복귀하고 있다. 한데 예외가 있다. 아시아계 미국인이다. 사람들이 북적이는 거리에서 난데없이 폭행을 당해 죽거나 부상당할 수 있는 상황에서 아시아계 미국인은 코로나19 봉쇄 때보다 더 고립감을 느끼고 있다. 증오범죄에 대한 공포로 외출조차 자제한다니 일상이 불안할 수밖에 없다. 그들은 스스로 물을 것이다. “나는 미국 시민인가, 이방인인가?”

최병준 후마니타스연구소장·논설위원

지난 2년간 세계는 스페인 독감 이후 최악의 팬데믹으로 위기를 맞았다. 봉쇄로 일자리를 잃거나 삶의 터전이 박살난 사람도 많다.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은 코로나19가 실험실에서 유출됐는지 밝혀야 한다고 중국을 압박하고 있다. 미국과 중국은 패권 전쟁 중이다. 미사일과 포탄만 주고받지 않았을 뿐 전쟁이나 다름없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에 이어 바이든도 틈만 나면 중국과의 대결에서 이기겠다고 말하고 있다. 정치 지도자들이 적대적 언사를 말할 때, 사람들은 구조적 문제가 아니라 눈에 보이는 적을 ‘창조’한다.

전쟁, 공황, 팬데믹, 테러리즘 같은 비상상황에서 소수자, 이민자, 난민 등을 희생자로 삼는다. 미국에서 태어나 자랐고, 좋은 대학을 나오고, 중산층이고, 부모가 살았던 아시아 국가의 언어를 한마디 못해도 표적이 될 수 있다. ‘네가 누구냐?’ ‘네 생각은 뭐냐?’는 궁금해하지 않는다. 그들이 당신을 누구로 생각하느냐가 판단 기준이다. 이때 건실한 시민이 순식간에 사회의 타자나 ‘적’으로 추락하는 것이다.

이는 민주주의 위기다. 민주주의는 자율성을 가진 주체로서의 개인과 함께 발전해 왔다. 민주사회의 개인은 왕이나 국가를 위해 개인을 무조건 희생해야 하는 신민이 아니라,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에 따라 공동체에 스스로 헌신하는 시민이다. 칸트 식으로 말하면 오성을 통해 합리적 판단을 할 수 있는 지적·도덕적 능력을 갖춘 개인이 시민사회의 기둥이다. 하지만 주체로서의 개인이 아니라 인종·집단적 지표가 그 사람의 정치·사회적 지위를 대신하는 것, 이것은 민주주의에 대한 타격이다.

바이든은 증오범죄법에 서명하고, 인종차별에 반대한다는 의사를 밝혔다. 이런 조치도 한계가 있다. 조지 W 부시 대통령도 9·11 후 이슬람 지도자들을 만났고, 이슬람 신도와 테러리스트를 구분해야 한다고 했다. 그럼에도 아랍계에 대한 ‘예외적’ 조치는 사라지지 않았다.

심지어 공권력까지 동원된 역사도 있다. 2차 세계대전 때 미국 정부가 일본계 미국인들을 수용소에 강제 구금했다. 일본계 미국인들은 자신의 거주지에서 쫓겨났고, 집과 직장과 예금을 잃었다. 9·11 테러 이후에도 미국 정부는 아랍계 미국인들을 구금했다. 테러리즘과 연루된 증거는 없었으며, 그들에게 미란다 원칙 같은 법적 권리조차 고지되지 않았다. 아랍인 중에는 기독교인이 있으며 이스라엘인들 중에도 아랍계가 있지만, 아랍인은 그저 위험한 무슬림으로 분류됐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수사학>에서 분노와 증오를 나누면서 “분노하는 사람은 연민의 정을 느낄 때가 많지만, 증오하는 사람은 어떤 경우에도 연민을 느끼지 않는다”고 했다. 분노하는 사람은 상대가 고통받기를 원하지만 증오하는 사람은 상대가 없어지기를 바란다. 분노는 사회를 변화시키는 힘이 될 수 있지만, 증오는 존재 자체에 대한 부정이다.

증오 앞에서 소수자들은 존재에 대해 증명해야 하는 상황에 몰린다. 9·11 테러 이후 아랍계 미국인들은 자신들의 집과 상가에 성조기를 걸어놓았다. 아시아계 미국인들은 미국과 중국이 패권 대결을 피하고 상호 공존하는 방향으로 해결책을 모색해야 한다고 생각하더라도, 그런 얘기를 쉽게 꺼내기 힘들 수 있다. 적대적 상황에서 ‘공존’ ‘평화’ 같은 말로 설득시키기 어렵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사회적 기여에 대해 증명해야 한다는 압박감도 느낀다. 기여는 ‘얼마나 쓸모 있느냐’란 의미로 변한다. 이때 공동체의 정당한 구성원으로서가 아니라 그가 생산하는 것이 더 중요해진다. 하지만 생산력이나 생산품은 대체 가능하다. 그들이 인간이 아니라 ‘쓸모’로 변할 때 한번 더 ‘추락’한다.

중국계가 열악한 소수라고 하기도 어렵다. 사상·종교·성·언어·경제력·지역 등의 이유로 누구나 소수가 될 수 있다. 방관은 증오범죄를 묵인하는 데 그치지 않고 확산시키는 동력이 된다. 정부와 시민사회도 항의하고, 연대해야 한다. 미국 내 아시아인의 문제는 우리 문제다.

최병준 후마니타스연구소장·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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