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오 속에서 마주 선 그들.. 화해를 연주하다

조성민 2021. 6. 17. 19:40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분쟁의 땅서 기적 일군 영화 '크레센도'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젊은 연주자
적대적 유산 안고 오케스트라 합류
처음엔 부자연·억지.. 화음 맞춰가
불가능할 것 같은 화해 멜로디 커져
모진 환경과 반목 속 피어나는 사랑
다니엘 바렌보임 실화 모티브 삼아
갈등 속 평화 의미 되돌아보게 해
서로 바라보고 하고 싶은 말을 쏟아내라는 에두아르트의 지시를 받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연주자들이 마주 서 있다. 티캐스트 제공
거리에서 폭발음과 비명이 터진다. 일상과도 같은 울림이지만, 영원히 익숙해질 수 없는 소리다. 창가에 선 소녀 라일라(사브리나 아말리)는 눈을 감고 바이올린에 집중한다. 몰입하려는 순간 밖에서 최루탄이 터진다. 최루가스는 창을 타고 넘어들어 온다. 감은 눈에서 눈물이 흐르고, 새어 나오는 기침을 막기 위해 입술을 꽉 깨문다. 연주는 계속돼야 한다. 저항하는 이들이 행진하는 발걸음 소리, 서로를 향한 고성과 고함이 공중에서 부딪쳐 산산조각이 난다.

영화 도입부에 등장하는 이 장면은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 사는 아랍인들이 겪는 생활을 단적으로 보여줬다. 밥을 먹다가, 길을 걷다가도 언제 어디서 포탄이 날아들지 모르는 불안한 환경 말이다. 그 속에서 음악이라는 꿈을 꾸는 라일라의 모습은 유대인 돈(다니엘 돈스코이)이 조용히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장면과 교차되며 안타까움을 더했다.

하지만 현실은 이보다 더하다. 불과 한 달 전 양국의 무력충돌로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서는 여성과 어린이 100여명을 포함해 최소 232명이 숨지고 1900여명이 다쳤다. 이스라엘에서는 12명이 사망하고 300여명이 부상했다.

◆마주 보고 아파하라

증오는 대물림된다. 평화 콘서트를 위해 오디션을 보고 오케스트라에 합류한 양국의 젊은 연주자들도 과거의 유산에서 자유롭지 않다. 서로에게 총칼을 겨눈 적은 없지만, 보고 듣고 자라며 커진 분노는 금세 이빨을 드러낸다. 아랍인과 유대인으로 갈라선 연주자들은 다툼을 멈출 생각이 없어 보인다.

지휘봉을 잡은 세계적인 마에스트로 에두아르트(페터 시모니셰크)는 이들과 정면으로 맞선다. 그는 “자네들은 적대적으로 연주하고 있네. 서로의 연주를 듣지 않고 소통도 하지 않아”라고 질타한 뒤, “질문을 하겠네. 자네들은 평화를 원하는가?”라고 묻는다. 그리고 그들을 마주 세우고 서로를 바라보게 한다. 하고 싶은 말을 쏟아내고 자신과 상대방의 고통으로 인해 아파할 시간을 준다.

오케스트라는 화합하지는 않고 좋은 연주를 보여줄 수 없다. 열정이 넘치는 젊은 연주자들에게 음악에 대한 공통 목표는 이들이 함께하기 위한 변명이 된다. 초반에는 다소 부자연스럽고 억지스럽지만, 점차 서로 음을 맞춰가기 위해 소통하기 시작한다. 불가능할 것 같은 화해의 멜로디는 ‘크레센도’라는 제목처럼 점점 커진다.
오케스트라의 수석 연주자 자리를 놓고 서로 경쟁하는 라일라(왼쪽)와 돈(오른쪽)이 바이올린 협주를 하고 있다. 티캐스트 제공
◆평화는 멀어도 희망은 있다

모진 환경 속에서 피우는 꽃처럼 양측이 반목하는 동안에서도 사랑은 피어난다. 팔레스타인 아버지에게서 클라리넷을 배운 오마르(메흐디 메스카르)와 철없는 이스라엘 프렌치 호른 연주가 시라(에얀 핀코비치)는 합숙기간 서로에 대해 알아가며 사랑을 키운다. 주변의 반대와 우려에도 아랑곳하지 않던 이들. 둘의 관계를 알게 된 시라의 부모님은 크게 분노한다. 둘은 오케스트라 공연을 하루 앞두고 도피를 선택한다. 평화를 연주하는 오케스트라는 무사히 공연을 마칠 수 있을까.

영화는 ‘현대 음악계의 거장’으로 불리는 피아니스트 겸 지휘자인 다니엘 바렌보임의 실화를 모티브로 했다. 유대인인 그는 1999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을 비롯해 중동 지역 출신 젊은 연주자들로 오케스트라를 꾸린다. 모두가 치유받길 바라던 꿈의 프로젝트는 동서 문명 간 화합을 염원한 괴테의 시집 ‘서동시집’에서 이름을 빌렸다. 이 오케스트라는 전 세계에 평화의 희망을 전했으며 2011년 광복절 임진각에서 열린 대규모 평화 콘서트에서 베토벤의 ‘합창’을 연주하기도 했다.

분단을 지나 정치, 젠더, 세대 등 현재도 수많은 갈등에 둘러싸인 우리에게 이 영화는 평화와 화해의 의미를 다시금 생각해보게 한다. 서동시집 오케스트라 역시 중동의 분쟁 상황이 격화할 때마다 공연은 위기를 맞았고, 2006년에는 분쟁에 휘말린 가족이나 지인들로 인해 몇몇 단원들이 퇴단하는 시련을 겪기도 했다.

평화는 쉽게 얻을 수 없다. 하지만 그렇기에 우리는 희망을 가져야 한다. 1992년 보스니아는 유고연방 탈퇴 선언 뒤 내전에 휩싸였다. 그해 5월27일 사라예보에서는 연방 탈퇴에 반대하는 세르비아계 민병대가 쏜 포탄에 빵을 사기 위해 줄을 섰던 22명이 목숨을 잃는다. 다음 날 현장에는 사라예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첼리스트였던 베드란 스마일로비치가 검은색 옷을 입고 나타난다. 그의 ‘알비노니 아다지오’ 연주는 22일간 이어졌다. 목숨 걸고 연주한 그는 그 이유에 대해 “나는 음악가다. 다른 주민들이 그러는 것처럼,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것”이라고 답했다.

조성민 기자 josungmin@segye.com

Copyright © 세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