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아파트 60년]④ 아파트를 방호기지로.. 탱크도 들어가는 유진맨숀의 필로티

고성민 기자 2021. 6. 17. 1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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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아파트 60년]

1958년. 한국산(産) 첫 아파트는 지금으로부터 약 60년 전 세워졌다. 이때부터 아파트는 전후(戰後) 주택난 해소를 위해 대규모로 지어진다. 고급 맨션이 유행하고 ‘건설 붐’으로 여의도·반포·잠실에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지어지며 아파트는 우리나라 대표 주거공간으로 자리 잡는다. 아파트에는 우리나라 역사와 문화, 기술까지 담긴 셈이다. [편집자주]

서울 지하철 3호선 홍제역에서 나와 통일로를 따라 북쪽으로 3분 정도 걸어가면 내부순환도로 아래로 1970년 준공된 특이한 주상복합 아파트가 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가로 200m의 길쭉한 건물을 따라 늘어선 넓고 높은 필로티. 웬만한 신축 아파트보다 더 크고 넓은 이 필로티는 군사적 목적으로 설계됐다. 유사시 이곳에 탱크를 배치하기 위해서다. 남북 군사적 긴장이 극심했던 당시 ‘싸우면서 건설하자’는 슬로건이 주택에도 스며들며 ‘서울 최후의 방어선’ 역할이 맡겨진 홍은동 유진맨숀이다.

◇김신조 침투 이후 서울 요새화 전략… “싸우면서 건설하자”

1968년 1월 21일,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할 목적으로 북한 특수부대 31명이 청와대 뒷산까지 침투했다. 군경의 불시검문과 소통 작전으로 29명이 사살됐다. 1명은 북으로 도주, 1명은 생포됐다. 유일한 생포자인 김신조의 이름을 따 ‘김신조 사건’ 또는 ‘1·21 사태’로 불린다. 김신조는 생포 후 기자회견에서 “박정희 모가지 따러 왔시요” 하며 청와대를 격앙케 한다. 청와대 바로 앞까지 방어선이 뚫린 이 사건으로 국내엔 “싸우며 건설하자”는 구호가 울려 퍼진다. 1968년 8월 16일자 조선일보를 보면 박정희 전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지금 우리 앞에 놓여있는 과제는 하루빨리 조국 근대화를 이룩하고 공산주의와 대결하기 위한 힘을 축적하는 일입니다….(중략) 싸우면서 건설하고 건설하면서 싸우자는 것은 이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 어디서든지 침략자를 무찌를 수 있는 만반의 태세를 완비하면서 건설의 일손을 조금도 늦추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이 즉 승공(勝共)의 길인 것입니다.
2010년 5월 촬영된 서울 서대문구 유진상가의 모습./ 서울연구원 서울연구데이터서비스

‘서울 요새화’ 작전은 직후 시작했다. 서울을 하나의 거대한 군사 진지로 보고 곳곳에 요새를 만들겠다는 구상이었다. 아파트나 고층 건물, 도로와 터널 등에 군사 작전을 수행하는 역할이 부여됐다. 청와대 경비 강화와 관광 겸용 목적으로 북악 스카이웨이가 건설됐고, 평시 교통시설로 쓰다 유사시 30만~40만명을 수용할 방공호 용도로 남산터널이 지어졌다.

광화문을 포함해 서울 도심 곳곳엔 시가전에 대비한 가각(街角·거리의 모서리) 진지도 들어섰다. 소총수가 잠복할 수 있는 ㄷ자 모양 나무화단이 1983년까지 총 1992개 설치된 것이다. 반포대교 아래쪽에 아직 남아 있는 잠수교(1976년)는 폭격 피해를 최대한 줄이고자 수면에 최대한 가깝게 지어 ‘안보교(安保橋)’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

압구정한양아파트에 기관총용 총안(銃眼)이 설치되고, 고양 일산신도시가 군사 목적을 담아 설계된 유명한 얘기도 이런 영향을 이어받은 것이다. 1994년 9월 27일자 조선일보는 “정부는 수도권 방어계획에 따라 1960년대 중반 이후 서울과 그 이북의 고층빌딩과 아파트나 한강과 인접한 도로 등 각종 시설물들을 건설할 때 유사시 군작전에 활용할 수 있도록 설계”했다며 “서울 시내의 고층 건물들은 거의 모두 군작전 상의 방어 개념을 감안해 설계됐으며 한강변의 올림픽도로와 인근 시설물들을 건설할 때 대부분 이같은 개념이 반영됐다”고 적었다.

◇北 전차 진격 막을 군사 요지… 탱크도 오가는 필로티

유진맨숀은 도봉시민아파트(1970년 준공·현재는 철거)와 함께 아파트가 요새화된 최초 사례로 전해진다. 서울의 정북(正北) 방향엔 북한산이 자리하고 있어, 북한군 전차는 북서쪽 홍은동이나 북동쪽 도봉동을 거쳐 침투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이 두 건물에 ‘서울 최후 방어선’ 역할이 주어졌다. 도시가 확장한 현재를 기준으로는 홍제동·도봉동보다 외곽에 위치한 주거지가 꽤 많지만, 1970년엔 이곳이 서울의 가장 외곽이었다.

‘최후의 방어선’이었던 영향인지 유진맨숀 건축과 관련해 당시 정부가 구체적으로 어떤 점을 중점으로 어떤 작전을 고려해 설계했는지는 정확한 사료가 남지 않는다. 사실 군사 용도로 지어졌다는 점도 재판 과정에서 최초로 알려졌다. 유진맨숀의 시공사 신성이 서울시에 제기한 하천사용료 관련 소송(84누343)에 대한 대법원의 1985년 판결문에서 밝혀진 것이다.

피고가 1969년 9월 4일 원고에 대하여 하천 복개 구조물 설치 및 상가아파트 건축허가를 하게 된 것은 당시 이 지역이 불량지구로서 피고 시로서는 민간자본을 유치하여 이 지역의 재개발사업을 시행할 필요가 있었고, 또 군사상으로도 이 지역의 하천을 복개하여 건물을 세움으로써 유사시 탱크 등을 배치하여 수도방위를 하는 등의 군사 목적을 수행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며, 그리하여 원고가 위 하천 복개 구조물을 설치함에 있어서 위 군사 목적에 맞추어 통상보다 견고한 규모와 구조로써 이를 설치하게 하였고, 이에 대한 별도의 감독까지 행한….(중략) 특수한 군사 목적을 겸하는 것으로서 이는 피고의 권고 내지 종용에 의하여 건축되었다는 사정 등을 보면….

하천부지에 지어진 이 아파트에 대해 서울시는 하천점용허가 기간(10년)이 지난 1981년 점용료를 부과했다. 그러자 시공사 신성이 “(유진맨숀을) 군사 목적으로 지으며 서울시가 하천점용료를 영구 면제해주기로 했다”고 주장하며 소송을 제기한 사건이었다. 대법원은 서울시가 군사적 목적을 위해 민간 기업을 권유·종용해 아파트를 짓도록 했다는 점에서 아파트가 존속할 때까지 하천 점용료를 면제해야 한다고 판시했다.

실제 유진맨숀의 필로티는 1층 전체를 완전히 비운 형태가 아니다. 1층에 상가가 들어선 가운데, 바깥쪽 면에만 넓고 높은 필로티가 조성됐다. 아군 전차가 상가를 뒤로 두고 포신을 꺼내면 북쪽을 향하는 구조다. 또 이 필로티는 방어선이 뚫리면 기둥을 부수고 건물을 통일로 쪽으로 무너뜨려, 북한 전차의 진격을 가로막는 역할도 맡는다는 해석이 있다.

위 대법원 판결문에는 유진맨숀이 ‘통상보다 견고한 규모와 구조’로 지어졌으며 신성건설이 공사비로 1억2500만원을 썼다는 내용도 나온다. 당시 정부가 영세 철거민을 대상으로 지었던 시민아파트는 동당 공사비가 1200만원에 불과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공사비를 수배나 더 썼다. 유진맨숀의 한 주민은 기자와 만나 “건물이 너무 단단해서 벽에 못을 하나 박기가 힘들고, 수리공도 당황해 일을 마치고 공임을 더 달라고 하는 일이 생기기도 한다”고 말했다.

◇B동 4~5층 ‘싹둑’ 잘려… 과거 군장성과 상류층 거주지로 유명

유진맨숀은 2개동(A동·B동)이 마주 보는 형태로 지어졌다. 지상 1층은 상가, 지상 2~5층은 아파트인 주상복합이다. 옥탑에 주거시설이 일부 마련돼 주민들은 6층 건물로 부른다. 전용면적은 75~222㎡로 가장 큰 평형은 67평형에 달한다. 서울 외곽에 위치한 주택이었지만 최대 67평형에 달할 정도로 넓은 면적과 당대 최신 아파트라는 점에서 고(故) 김영관 주월남 대사, 가수 김세레나씨, 군장성, 청와대 직원 등 상류층이 거주했던 곳으로 전해진다.

서울시는 1993년 내부순환도로 건설을 추진하며 이 도로 노선이 유진맨숀과 충돌하게 되자 유진맨숀 B동 4~5층을 1994년 철거했다. B동 전체를 보상금 총 150억원을 들여 수용했고, 나머지 1~3층은 철거와 존치 사이에서 고민하다 건물 상태가 양호하다는 판단으로 서울시 서류창고로 쓰기로 결정했다. 1996년의 일이다. 현재도 유진맨숀 B동은 4~5층이 잘린 상태로 ‘서대문구 공유캠퍼스’로 쓰이고 있고, A동만 주상복합 아파트로 남아 있다.

B동 4~5층을 철거하는 데에는 당시 최신 기술이자 현재까지도 건축물을 정교하게 철거할 때 쓰이는 공법인 ‘다이아몬드 와이어쏘(Diamond Wire Saw)’ 방식이 채택됐다. 이 철거방식은 굴삭기에 집게처럼 생긴 압쇄기를 장착해 위에서부터 부숴가며 철거하는 일반적인 크러셔(Crusher·압쇄기) 공법과 비교하면, 믿어지지 않을 만큼 신기한 기술이었다. 옛 광진교를 철거한 1993년 처음으로 국내에서 이 공법이 사용됐고, 건물 중에서는 유진맨숀이 최초로 적용됐다. 1994년 6월 18일자 조선일보는 이같이 적었다.

‘어떻게 4층, 5층만 싹둑 잘라낼 수 있습니까.’ 내부순환도로 공사로 인해 상가건물의 일부를 철거당해야 할 처지에 놓인 유진상가의 상인들이 곧 착수될 공사를 앞두고 갖고 있는 의문 사항이다. 건물 전체를 해체하는 것은 많이 봐왔지만, 꼭대기 4, 5층만 살짝 들어낸다는 말이 믿기지 않기 때문이다. 주민들의 이같은 의문과 불안을 덜어주기 위해 서울시는 16일 오후 2시 유진상가 사무실에서 입주 상인들에게 철거 공법에 대한 설명회를 가졌다.

지난 13일 찾은 유진맨숀은 준공 50년이 지난 건물임에도 근처에 ‘낙석 주의’ 표지판 하나 없이 튼튼한 모습이었다. 외부 도색만 일부 벗겨져 있었다. 과거엔 중상류층이 거주하는 아파트로 유명했지만, 요즘은 인왕시장 상인들이 많이 거주한다고 한다. 이날 만난 유진맨숀 주민 정모(73)씨는 자택 대문 앞에서 마늘 껍질을 벗기고 있었다. 정씨는 “1970년대만 해도 아파트가 별로 없을 때여서 서민들은 엄두도 못 내는 아파트였다”면서 “유진맨숀에는 ‘별자리(군장성)’들이 많이 사는 것으로도 유명했다”고 말했다. 이어 “지금은 주변 인왕시장 상인들이 많이 거주한다”면서 “집이 넓고 튼튼해 살기에는 참 좋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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