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되겠다, 기본을 다시 잡아야겠다
[[휴심정] 법인스님의 대숲바람]
안 되겠다. 기본을 다시 잡아야겠다.
지난 5월 26일, 음력으로는 4월 15일, 여름 석 달 동안 선원의 수행자들은 일체 산문을 나가지 않고 참선 정진합니다. 이 기간을 안거라고 합니다. 안거는 석가모니 부처님 당시부터 이어오고 있는 수행 전통입니다.
그날 나는 나만의 특별한 안거에 들었습니다. 천일 정진을 시작했습니다. 지리산과 실상사를 떠나지 않고 천일 동안 나름의 방식으로 정진을 이어가기로 했습니다. 먼저 극락전에서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극락전은 아미타 부처님이 본존불로 계십니다. 기도 순서는 이렇습니다. 먼저 아미타불 관련 경전을 독송합니다. 이어 목탁을 울리며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을 일념으로 계속 부릅니다. 이른바 염불수행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과 공덕을 마음에 새기며 부처님의 명호(名號)을 소리 내어 부릅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 ...
이십대 초반, 계룡산 신원사에서 천일기도를 처음 시작했습니다. 그 이후 몇 번 백일기도는 했지만 천일을 기한으로 하는 기도는 지금이 두 번째입니다. 그동안 자유롭게 나들이했던 습관 때문인지 적응하려면 시간이 걸릴 듯합니다. 묵은 습관 털어내고 새로운 습관을 몸에 새기는 일이 쉽지만은 않습니다. 작은 습관 하나 고치고 새롭게 하는 일도 이리 힘듭니다. 그러니 모든 일에 겸손하고 정신 바짝 차리고 투철하게 매진해야겠습니다.
제가 새삼 천일기도정진을 시작한 이유가 있습니다. 기도는 나의 삶에 대한 반성과 고백이고, 진실한 삶을 복원하기 위한 발원입니다. 어느덧 출가한지 46년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많은 세월이 흘렀는지 몰랐습니다. 올 3월, 그동안 여기저기 쓴 글을 모아 산문집을 출간했는데, 출판사 편집자가 책 표지에 “46년 출가의 길에서 길어 올린 인문정신의 극치”라는, 과분한 문장으로 나를 당혹케 했습니다. 가슴이 철렁했습니다. 46년의 세월, 나의 마음 살림은 부실하기 짝이 없습니다. 심한 자괴감과 자책이 밀려왔습니다.
지금의 나를 살펴봅니다. 이웃들을 대하면서 수행자의 품격을 유지하고자 그럴 듯하게 처신은 했지만 명실상부하지는 못했습니다. 거듭 부끄러웠습니다. 만해가 <님의 침묵>에서 ‘부끄러움’이라는 시어를 유독 많이 불러냈는지를 알 것 같았습니다. 무엇보다도 자신에게 정직하지 못했고 일상에서 성실하지 못했습니다. 그럴 듯한 삶이었던 것이지, 그러하지는 못했습니다.
“아! 이래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번쩍 들었습니다. 그동안 사명과 원력이라는 이름으로 무슨 일을 하려고만 했지, 자신의 마음 살림을 살피는 일에는 소홀했던 것입니다. 지금부터 다시 자신을 들여다 보고 정직하고 성실하게 삶을 가꾸어가지 않으면 죽을 때 크게 후회하겠다는 위기감이 밀려왔습니다.
지금 내내 이런 말이 떠오릅니다. “세상의 평화를 원한다면 먼저 그대 자신이 평화가 되라” 저는 그동안 이런 기본에 소홀했습니다. 나 자신의 심신이 평온하지 않은데, 내가 아무리 무심과 평화를 논리적으로 말한다고 해도, 상대는 그 ‘말’에는 수긍하겠지만 ‘마음’까지 평화롭지는 않을 것입니다. 나눔과 공감은 말이 아닌 정직한 기운으로 전해지는 데 말입니다.
그동안의 일상을 점검해 보았습니다. 경전과 책을 읽고, 사유하고, 해석하고, 말하고, 글을 쓰는 일상이 주류를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사유와 해석이 그대로 나의 삶이 되지는 못했습니다. 분석하고, 해석하고, 대안을 말하는 것으로 수행이 되고 원력을 실천한다고 착각한 거 같습니다. 내면화 되지 못하는 지식과 사유는 참 허약하기 짝이 없습니다. 이제는 보다 안으로, 안으로 눈길을 돌려야 할 때라고 자각했습니다.
그래서 마음 먹고 ‘천일 정진’을 하기로 했습니다. 정진은 ‘규칙과 반복’이 근간입니다. 새삼 헤아려봅니다. 그동안 참 불규칙적이었고, 꾸준하지 않았고, 고요 하지 못했고, 정성스럽지 못했습니다. 그저 반짝하는 기술이고 재주였을 것입니다. 그러니 심신이 조화로울리 없고 믿음을 주지 못했을 것입니다.
소년 시절, 출가 초기와 중반까지는 절집 가풍에 따라 정석으로 하루 일과를 보냈습니다. 조석예불, 공양, 공동 울력 등 기본에 철저했습니다. 경전 독송과 좌선을 비교적 꾸준하게 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사십대 중반부터 종단과 교구본사의 이런저런 소임을 보면서 이런 기본에 소홀했습니다. 책은 지금까지 손에서 놓은 적은 없었지만 나머지는 매우 불규칙적이었고 성실하지 못했습니다. 홀로 지내던 일지암 시절, 자정이 넘도록 책을 보고 늦잠을 자며 아침 예불을 아예 하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도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일들을 많이 만들어서 분주하게 움직였습니다. 나름 밥값 한다고 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안 실림과 바깥 살림이 조화롭지 못했습니다. 무언가 잔뜩 들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초기 경전에는 근면을 강조한 부처님의 말씀이 많습니다. 열반 직전에도 “세상은 무상하다, 부지런히 정진하라.”고 당부하십니다. 요즘 새삼 이 말씀이 절실해집니다. 사실 “그동안 참 게을렀구나”, 하는 자책이 있습니다. 분주함과 부지런함은 같지 않습니다. 분주함은 차분하고 침착하게 살지 못하는 모습입니다. 한마디로 허둥지둥 중구난방하는 볼썽 사나운 모습입니다. 반면 부지런함은 하지 않아도 될 일을 하지 않고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규칙적이고, 차분하고, 진심으로, 꾸준히 하는 모습입니다. 이게 바로 품격 있는 수행자의 모습일 것입니다.
규칙과 반복, 이제 생을 마감하는 순간까지 염두에 두고 일상에서 실행해야 할 일입니다. 매일 규칙적으로 사는 일이 나의 기본을 다지는 수행입니다. 중심을 잡고 초심을 잃지 않는 일이 수행입니다.
몇 스님들은 출가의 초심과 자기 중심을 잡기 위해 반드시 하는 일이 있습니다. 교구 본사 주지를 역임하고 종단의 원로이신 노스님이 계십니다. 그 스님은 어느 절에 살든 평생을 새벽 도량석을 손수 하십니다. 도량석이란 새벽 3시 경내 도량을 돌며 목탁을 치며 염불하는 의식을 말합니다. 사찰의 하루 일과의 시작이며 대중을 깨우는 것입니다. 도량석을 하려면 적어도 2시 30분에는 일어나야 합니다. 이 스님은 교구본사 주지 소임을 볼 때도 도량석을 하셨고, 소임 이후에도 매일 빠짐없이 목탁을 치며 청아한 목소리로 경내를 돌았습니다. 이런 규칙과 반복이 대중에게 감동을 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자신의 중심을 세우는 방편이었습니다.
또 이런 스님들도 있습니다. 출가 이래 학문에 매진하고 모든 경전에 두루 해박하신 노스님입니다. 이 노스님은 조석 예불이 끝나면 ‘초발심자경문’이나 ‘화엄경 보현행원품’을 독송합니다. 이 경전들은 내용이 복잡하거나 이해가 어렵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늘 정해진 시간에 규칙적이고 반복적으로 독송합니다. 두 경전은 읽으면 읽을수록 뜻이 깊고 깊으며 간절하고 간절합니다. 이 경전을 매일 독송하는 수행은 흐려지는 초심을 새기고 흔들리는 중심을 세우는 방편 입니다. 이런 스님들을 생각하면 문득 어떤 작가의 일상이 떠오릅니다. 전업 작가인 그는 자신의 집이 직장입니다. 그는 아침 밥을 먹으면 옷을 단정하게 갖추어 입고 2층에 있는 자신의 집필실로 출근합니다. 그곳에서 책을 읽고 글을 씁니다. 점심 때가 되면 1층으로 내려와 식사를 합니다. 잠시 휴식하고 다시 집필실로 가서 오후 내내 작업을 합니다. 그리고 퇴근을 합니다. 텔레비전에서 그런 모습을 보면서 생각했습니다. “아, 저 분은 자신에게 경건한 사람이구나.” 이기적 욕망과 자기애(自己愛)는 다를 것입니다. 진정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에게 경건합니다. 경건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들을 규칙적으로, 반복적으로 실행합니다.
그렇습니다. 수행이란 이렇게 자신에게 정직하고 경건한 삶을 가꾸는 몸짓인데, 나는 사유와 논리만이 수행이고 깨달음인 줄 알았습니다. 왜 붓다가 ‘게으름’을 경책하고 ‘부지런함’을 독려했는지 알겠습니다. 반드시 해야 할 일을 규칙적으로 반복적으로 하지 않으면 내 정신에 녹이 생깁니다. 쇠가 단단함과 날카로움을 잃고 소멸하는 원인은 내부에서 발생하는 녹입니다. 게으름이 녹입니다. 녹슬지 않으려면 늘 갈고 닦아야 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상식이 비법이고 신통력입니다.
천일기도를 인연으로 초발심을 회복하고자 합니다. 사람은 참 늦게 철이 드나봅니다.
글 법인 스님/실상사 한주
***이 시리즈는 대우재단 대우꿈동산과 함께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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