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는 숲과 함께 자란다" ESG의 시대에 일주 이임용을 돌아보다

우경희 기자 2021. 6. 17. 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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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 이임용 태광그룹 창업주(오른쪽). 태광산업사 설립 직후로 추정./사진=태광그룹


"옛날 나무꾼은 장에 가 나무를 다 팔고나면 이웃이 부탁한 비누 한 장, 낫 한 자루, 고무신 한 켤레부터 먼저 샀어. 그리고 그 다음에야 자기한테 필요한 물건을 샀는데, 제 물건은 허리춤에 대충 차고 와도 남의 물건은 행여 다칠세라 광목 수건에 고이고이 싸서 소중히 갖고 왔다네."

한국 섬유산업의 거목 일주 이임용 태광그룹 창업주(1921~1996) 탄생 100주기를 맞아 고인의 삶과 철학이 새삼 재조명된다. 일주의 지인이라면 모르는 이가 없는 '장터에 간 나무꾼' 얘기는 기업과 사회를 바라보는 일주의 시선을 그대로 요약한다. 사회에 기여하고 국민에 기여하는 기업, 사회 전체의 부와 가치를 높이는 기업에 대한 끝없는 일주의 고민은 그런 철학에서 나왔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이후 폐허만 남은 고국에서 섬유산업 중심 근대화의 길을 걸은 일주. 흥국생명을 통해 국민의 복리후생을 꿈꾼 일주. 일생을 섬유·화학사업 육성과 함께 육영에 매달린 일주는 40여년 전 이미 종신고용제를 주장할 만큼 사회적 가치에 주목했다.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경영이 기업 생존의 필수 조건이 된 현재에 일주의 삶이 던지는 메시지는 그만큼 크고 강렬하다.

"땅값 올라 번 돈이 더 많다고? 단단히 잘못된 것"

일주는 1937년 열여섯의 나이로 홀로 일본으로 건너간다. 6년간 새벽 4시 신문배달을 시작으로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는 공부했다. 운수업, 섬유산업, 식품산업을 가리지않고 경험했다. 일주는 1921년 3남1녀 중 3남으로 태어났다. 둘째 형은 어려서 죽고 맏형도 중국서 행방불명된 불운한 가정사 속에서 집안의 장남 격인 일주의 일본행은 큰 도전이었다.

귀국 후 부산에서 공무원으로 일하던 일주는 광복 이후 1950년 동양실업과 동업으로 산업계에 뛰어든다. 그룹 모체인 태광산업 창립기념일이 바로 이날 1950년 10월 25일이다. 1953년 동양실업을 완전 인수한 일주는 1954년 태광산업사를 설립한다. 태광그룹의 기반이 완성된 시점이 바로 이 때다.

1970년대 일주의 태광은 말 그대로 폭발적으로 성장한다. 동양합섬 본사를 서울로 이전하면서 이듬해 합병했고 배구단 창단, 제편공장 분리, 대우파일 인수, 흥국생명 인수, 대한화섬 인수, 천일사(태광에로이카·쾨헬) 인수, 태광산업 울산 스판덱스 공장 준공, 고려상호신용금고 인수, 석유화학 1~3공장 착공까지 승승장구했다.

이런 일주의 경영사는 다르게 보면 '원칙을 지키기 위한 어려움'을 실감하는 기간이었다. 건설과 호텔산업 등에 진출하라는 제안은 "기업을 운영해 버는 돈보다 사대문 안 땅값이 올라서 버는 돈이 많다면 단단히 잘못된 것"이라며 일축했다.

1967년 4월 준공한 동양합섬 울산공장은 한국 경제성장의 전초기지였다./사진=태광그룹


대한화섬 인수는 태광이 섬유산업계에 우뚝 서는데 결정적 계기가 됐다. 당시 대한화섬은 국내 최초 폴리에스테르 생산업체로 출범했지만 이후 삼양사와 선경 등 후발주자들이 뛰어들며 입지가 좁아진 상태였다.

대한화섬을 따낸 일주는 인수 3년만인 1978년 울산에 폴리에스테르 공장을 가동했다. 국내선 생소했던 연속직방 기술을 도입해 국내 섬유산업에 일대 혁신의 전기를 열었다. 태광그룹 관계자는 "대한화섬은 대표적 내실기업으로 성장했다"며 "1992년 한국능률협회 선정 '상장기업 우량도 조사'에서 태광산업과 대한화섬이 1~2위를 차지한건 상징적 장면"이라고 말했다.

흥국생명 인수는 기업의 체질을 바꿔놨다. 흥국생명은 1973년 인수 당시 자산 29억원에 부채가 43억원이었다. 대우그룹과 경쟁 끝에 흥국생명을 인수한 일주는 사업 투신 이래 처음으로 태광을 떠나 흥국생명 사장에 취임했다. 재무구조 개선에 뛰어든 일주는 좌고우면하지 않았다. 국민의 노후와 안정된 생활이 달린 사업이었고, 또 흥국의 부실을 납득할수도 없었다.

흥국생명은 인수 3년만에 괄목할만큼 달라졌다. 1975년 1조원이던 계약고는 1977년 2조원을 넘어섰다. 태광그룹 관계자는 "지금도 흥국생명엔 연로한 가입자들이 많이 계시다"며 "일주가 흥국생명을 인수하고 정상화하던 당시 일주의 철학에 동감해 가입하고 이를 지금까지 유지하는 분들"이라고 말했다.

1년에 두 번 세무조사 후 "회장님 미안했습니다"

일주의 처남은 박정희 군사정권 당시 끝없이 정권과 각을 세웠던 야권 거두 이기택 전 민주당 총재다. 정치적 압력이 기업의 명운에 곧바로 영향을 주던 시절이지만 일주는 단 한 번도 원망섞인 말을 하지 않았다. 훗날 "기업은 기업이고 정치는 정치다. 나는 처남이 정치하는걸 말릴 수도 없지만 도와줄수도 없다. 세상에 태어나 각자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것"이라고 돌이켰을 뿐이다.

이 전 총재가 10대 국회의원이자 야당 사무총장이 된 1979년 봄, 역시나 태광에 대한 세무조사가 시작됐다. 두 달여 간 전국 모든 공장에서 사찰이 계속됐다. 그리고 그해 가을 뜻밖에 세무조사가 또 시작됐다. 직원들을 소환해 심문하듯 조사했고 은행문건을 온통 뒤지느라 은행 거래가 중지됐다. 이 전 총재에 대한 압박 수단으로 태광을 선택한 것이었다.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이후 10.26(박정희 전 대통령 시해사건)으로 언로가 트인 이후 김수학 국세청장이 일주에게 사석에서 전한 말은 지금도 회자된다. 그는 "기업은 망해도 기업인은 산다고 하는데 회장님은 전혀 아닌 것 같다. 직원을 보내시면 압수한 서류를 보내드리겠다. 그동안 미안했다"고 말했다. 세무조사가 외려 일주의 투명한 경영철학을 드러내는 계기가 됐다.

전두환 정권이 유화국면으로 돌아섰던 1984년, 이 전 총재가 신당 창당을 주도하자 태광에 다시 세무조사가 시작됐다. 일주도 48시간에 걸쳐 조사를 받았다. 이번엔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당시 공장 두 개 라인을 깔 수 있는 돈인 104억원을 추징당했다. 일주는 이에 대해서도 "털 것은 털고 가자"고 했을 뿐 별다른 말이 없었다.

"내 딸들아 모두 꿈을 이루거라"

생전의 일주가 체육대회에서 학생들과 함께 달리고 있다./사진=태광그룹
일주가 학교를 세울 꿈을 구체적으로 준비하기 시작한건 1960년대 후반부터다. 동래공장 맞은편 금정산 기슭에 45만평 부지를 확보했다. 대학을 짓는게 일주의 목표였다. 정권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대학이 어렵다면 고등학교를 짓자고 마음먹은 일주는 1975년 교직 경험이 있던 계열사 대우파일 박시춘 사장을 불러 서울에 여자 중고교를 짓자고 제안했다. "나라가 잘 되려면 가정교육이 잘 돼야 하고, 가정교육이 잘 되려면 어머니가 될 여자가 먼저 제대로 배워야 한다"는게 일주의 지론이었다.

세상을 화합하게 한다는 '세화(世和)'라는 교명도 미리 지어놨다. 세화는 일주의 부인 이선애 여사의 호다. 이 여사는 반가의 2남1녀 중 외동딸로 자랐다. 딸에겐 제대로 교육을 시키지 않던 시절이었다. 육영사업이 이 여사 뿐 아니라 일주의 평생 숙원이 된 배경이다. 두 사람의 꿈을 함께 이룬 셈이다.

1977년 일주학원을 설립하고 당시만 해도 물이 고여있는 유수지였던 학교 부지를 메워 공사를 시작했다. 교사에 설치될 양변기를 놓고 논쟁할 정도로 공을 들였다. 측근이 "양변기를 써 본 학생이 몇명이나 되겠느냐"며 반대하자 일주는 "지금은 안 써도 나중 되면 다 쓰네"라며 일축했다. 아파트에도 많지 않던 중앙난방 보일러와 에어컨도 설치했다. 일주 자택에도 에어컨이 없던 시절이다.

1981년 첫 졸업생을 배출한 세화여고가 돌풍을 일으키자 남자고등학교를 지어달라는 요청이 빗발쳤고 일주는 1986년 인근에 세화고를 세운다.

태광여상은 가정형편이 어려워 학업을 잇지 못하는 학생들에게 가장 좋은 환경에서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주자는 일주의 생각이 가장 구체화된 사례다. 1987년 부산에 착공돼 세화여고의 두 배 부지에 어학실, 생활실 등 첨단 설비를 들였다. 1000평의 운동장엔 잔디를 깔았다. 교복과 교과서, 기숙사도 모두 무료였고 공장에서 학교를 다닐 수 있게 통학버스도 운행했다.

일주는 아무리 바빠도 태광여상의 입학식과 졸업식엔 모두 참석했다. "비록 내 딸은 아니지만 내 딸처럼 사랑한다. 어디를 가서든 열심히 노력해서 원하는 꿈을 이루도록 해라 딸들아." 태광여상의 졸업식은 언제나 눈물바다였다. 태광여상의 교정은 학생들에게 따뜻한 집이었다. 일주 사후 태광여상이 갑작스레 폐교된 것은 큰 아쉬움이 남는다.

일주가 1992~3년 매년 100억원 이상을 수 차례 출연한 일주학술문화재단은 태광그룹 사회공헌의 꽃이다. 당시 재계 순위 20위권이던 태광이지만 재단 규모는 다섯 손가락 안에 꼽혔다. 일주재단은 1991년 3명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30년 간 아무 조건 없이 총 200명의 해외 박사 장학생을 선발해 총 250억원을 지원했다. 이 중 160여명이 국내외서 다양하게 활동하고 있다.

"나무는 숲과 함께 자란다" 일주 어록에서 보는 ESG 경영철학
울산공단을 걷는 일주. 매일 공장을 돌아보는게 그의 일과였다./사진=태광그룹
나무(기업)는 숲(사회)과 함께 자라야 한다는게 일주의 평생을 관통하는 철학이다. 일주의 어록에는 그의 생각이 잘 녹아있다.

1980년 태광산업 임직원들과 만난 일주는 "내가 창업한 이유는 직원의 생활 안정을 통해 사회 안정을 기하기 위함이요, 인재를 개발해 사회공헌에 이바지하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5년 후인 1985년엔 전 직원이 모인 자리에서 "우리 회사는 틀림없이 종신 고용제를 실현해 회사 장래는 물론 국내 경제도 촉진할 것"이라며 "전 직원은 스스로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자각하고 자기 자신을 연마할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1977년엔 "열심히 일하고 노력하는 사람은 더 많은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제도적으로 기회를 줄 것이다. 능력자와 무능력자가 동등한 대우를 받는다면 의욕적인 사원들을 무력하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고 했다.

이를 모두 앞선 1975년 4월 일주는 흥국생명 직원들과 만난 자리에서 "우리 나라를 건설구조물에 비유한다면 콘크리트가 아직 굳지 않은 상태라고 말할 수 있다. 나는 이를 조속히 극복하면서 완전한 복지사회로 가는 기틀을 마련하는데 모든 노력을 다 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나무가 숲과 함께 자라는 완전한 복지사회 건설의 철학, 경영과 육영의 성과, 지금까지 이어지는 일주학술문화재단 등을 남기고 일주는 1996년 11월 2일 영면했다. "오늘 무척 행복해보인다"는 아들 이호진 태광그룹 최대주주의 말에 "그래, 고맙다"고 답한게 생전의 마지막 육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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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경희 기자 cheerup@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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