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와 삶] 마음에도 저울이 있다면
[경향신문]
프리랜서 생활을 하면서부터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 부쩍 늘었다. 시간이 되는지부터 시작해서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상대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지, 글을 쓰거나 강연하거나 사회를 보는 데 내 에너지가 얼마나 투여될지, 그 일을 수행함으로써 주어지는 물질적 보상은 적정한지, 내가 얻게 될 비물질적 요소는 무엇일지, 최종적으로 그 일을 할지 말지까지 순차적으로 따져야 할 것이 너무나도 많았다. 예전에는 그저 불러주시는 게 고마워서 자세한 사항을 듣지도 않고 흔쾌히 수락하곤 했다. 몸이 이상 신호를 보내온 것은 재작년 여름이었다. 강연을 하나 마치고 행사 사회를 보기 위해 버스에 몸을 실었는데 몸이 휘청하는 게 느껴졌다. 앉아서 쉬면 좀 괜찮겠지 싶었는데 버스는 만원이었다.
원래는 버스에서 스마트폰으로 다음날까지 보내야 할 원고의 얼개를 짜려고 했었다. 돌이켜보니 노트에 하던 일을 데스크톱으로, 데스크톱으로 하던 일을 노트북으로, 노트북으로 하던 일을 스마트폰으로 하고 있었다. 모바일 기기의 ‘모바일(mobile)’은 “이동하는, 움직임이 자유로운”이란 뜻이다. 움직임이 자유로운 것을 들고 나는 이동하는 셈이다. 이동하면서도 끊임없이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프리랜서인데 전혀 자유롭지 못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몸은 이동하는데 마음은 제자리에서 굳고 있는 것 같았다.
이동 중에 지역 공무원들을 위한 강연 요청 전화를 받았다. “죄송하지만 못하겠습니다.” 상대의 음성을 한참 듣고 나서야 기어드는 목소리로 말했다. 기민하게 응답하지 못한 첫날이었다. 흔쾌히 수락하지 못한 첫날이었다. 몸이 힘들고 마음의 용적이 좁아질 대로 좁아져 있던 날이었다. 다리의 힘이 풀려서 바닥에 그대로 주저앉고 싶었다. 때마침 빈자리가 생겨 그곳에 몸을 내던지듯 뉘었다. 온몸이 천근만근이었다. 스마트폰 알람을 꺼두고 창밖으로 흘러가는 풍경을 눈에 담았다. 지하철보다 버스를 선호하는 것이 바로 이것 때문이라는 사실이 문득 떠올랐다. 그제야 몸과 마음이 함께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날 이후, 조금씩 거절하는 법을 익히고 있다. 전화로 요청이 올 때면 스마트폰으로 달력을 열고 일정을 확인한 뒤, “그날은 괜찮습니다”나 “이미 다른 일정이 있어 할 수 없을 듯합니다”라고 대답한다. ‘할 수 없을 듯하다’처럼 여지를 남겨두는 표현이 좋지 않다는 걸 알고 있다. 칼같이 거절하고 날렵하게 고사하는 법이 아직까지도 도통 몸에 붙지 않아서다. 보통은 메일로 관련 사항을 보내달라고 부탁드린다. 그 일을 할지 말지 결정하기 위해 시간을 버는 셈이다. 직관적으로, 다분히 즉흥적으로 결단을 내리는 게 익숙한 내게 신중하게 고민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오랜만에 중학교 때 친구를 만났다. 그는 어린 나이에도 “일장일단이 있지”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썼다. 확률을 계산하고 이것과 저것을 비교하는 데 능한 친구가 금융회사에 입사했다는 말을 듣고 고개를 연신 끄덕였었다. 내 고민을 털어놓으니 저울을 하나 마련하라고 한다. 일의 경중을 재는 저울이 아닌, 그 일을 해내기 위해 써야 할 마음을 재는 저울 말이다. 이때 중요한 것은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을 때 다가올 무력감이나 열패감까지도 계산에 넣는 것이다. “새로운 것에 도전하지 못하게 되지는 않을까?” “도전에 대한 설렘보다 두려움이 클 때는 자칫 무모해질 수 있거든.” 친구는 숫자처럼 명쾌했다.
돌아오는 길에 전화를 받았다. “○○중학교입니다. 강연 때문에 연락드렸습니다. 아이들이 책을 읽고 준비한 게 많아요. 약소한 금액이지만….” “네, 가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나니 헛웃음이 나왔다. 사람은 여간해선 변하지 않는다. 내 마음에도 저울이 있다면 이미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는 상태일 것이다. 일장일단이 있기를 바라는 수밖에.
오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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