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의 눈] 대중 외교에 대한 '거친 생각'
[경향신문]
지난달 한·미 정상회담처럼 보수, 진보 양쪽으로부터 지지를 받은 경우도 흔치 않을 것이다. 보수는 공동성명에서 대만해협과 남중국해를 언급하며 중국 견제에 발을 들였다고 보고 점수를 줬을 테고, 진보는 판문점선언과 싱가포르 공동성명에 대한 미국 지지가 확인된 것에 주목했다.
중국이 ‘견제’로 간주할 만한 내용이 공동성명에 포함된 것이 대중 외교의 변화로 비칠 만했지만 국내의 우려는 크지 않았다. 대만·남중국해를 언급했으나 중국을 지칭하지 않았고, 정부가 한·중관계에 변화가 없음을 강조했기 때문일 것이다. 강압적인 전임 대통령과 딴판인 조 바이든 대통령의 능란한 환대가 한국을 저항감 없이 미국 쪽으로 한발짝 끌어당긴 면도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지난 몇년간 한국 사회에 누적돼온 ‘중국 피로증’이 여론 지형을 바꿔놓은 것이 컸다.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로 불거진 한·중 갈등은 문재인 정부가 초기에 ‘3불 원칙’을 내놓으면서 진화됐다. 하지만 한한령(限韓令) 해제 등 중국의 전향적 조치가 뒤따르지 않으면서 양국관계는 ‘냉온정지’ 상태가 계속됐다. 한국 정부를 대하는 중국 당국자들의 태도는 더 문제였다. 장관급 인사가 대통령의 팔을 툭툭 치거나, 외교장관 회담을 한다며 한국 장관을 대만 코앞인 샤먼(廈門)으로 호출하는 행태에 한국인들은 공분했다. 게다가 6자 회담을 주도하던 예전과 달리 중국이 한반도 문제 해결에 적극성을 보이지도 않는다. ‘한반도 평화에 역할이 막중한 중국과 잘 지내야 한다’는 논리도 힘이 빠졌다.
특히 청년 세대에서 반중 감정이 치솟고 있다. 한국일보가 최근 실시한 북한·중국·일본·미국 호감도 조사(0~100도로 표현)에서 20대의 중국 호감도(17.1도)는 미국(56.1도)은 물론 일본(30.8도), 북한(25.3도)보다도 낮았다. 30대도 북한(25.3도), 일본(23.9도)보다 중국(20.3도)을 더 비호감으로 치는 결과였다. 일본보다 중국 호감도가 앞서는 40~60대와 다르다. ‘거친 생각’이라며 청년들을 ‘불안한 눈빛’으로 볼 것도 없다. 대중 콤플렉스가 없고 남북관계 개선에 체감도가 낮은 청년들은 ‘중국과 잘 지내야 한다’는 당위론에 구애되지 않는다. 홍콩 시민들에 대한 중국의 폭압, 김치·한복 종주국 논란도 청년들을 자극했을 것이다. 이런 정서가 정상회담에 대한 지지로 이어진 것이다. 오만한 중국에 ‘하이킥을 한 방 먹였다’는 반응이 나오는 이유다. 한·미 정상회담에 이어 지난 11~13일 영국에서 열린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에서 채택된 공동성명은 신장·홍콩·대만·남중국해 문제에서 중국을 거명해 비판했다. 한국은 이 회의의 초청국이어서 성명에는 참여하지 않았지만, 무관하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이 한·미 정상회담과 G7 정상회의를 계기로 ‘루비콘강’을 건넌 것으로 보는 것은 맞지 않다. 미국과의 동맹, 중국과의 전략적 협력 동반자 관계를 조화롭게 유지해 나간다는 정부의 외교기조에도 변화는 없다. 다만, 좀 더 유연해지는 중이다. 금을 딱 그어놓고 이쪽은 ‘친미’, 넘어가면 ‘친중’으로 가르는 ‘38선식 프레임’에 더 이상 갇히지 않겠다는 것이다. 선(線)이 아니라 지대(zone)를 좁지 않게 설정해 그 범위 내에서 움직이며 국익을 꾀하는 외교가 바람직하다. 그럴 만큼 국력도 커졌다. 이번 정상회담이 그 첫 단추를 끼운 셈이다.
문재인 정부가 미국 쪽으로 확 쏠린 것처럼 보이는 것은 보수가 현 정부에 씌워놓은 ‘친중·반미’ 프레임의 영향도 있다. 보수정부가 ‘친중’할 땐 가만있다가 정권이 바뀌자 물고 늘어지니 더 문제다. “중국의 꿈과 한국의 꿈은 하나로 연결돼 있다”는 박근혜 대통령의 방중 연설과 문 대통령의 ‘중국몽(夢)’ 발언은 같은 얘긴데 반응은 딴판이다. 이런 내로남불이 외교정책 운용에 악영향을 미치는 것은 물론이다.
정상회담 결과에 중국은 충격이 컸을 테지만, 표면적인 반응은 온건했다. 외교부 대변인이 ‘불장난하지 말라’고 했고, 왕이 외교부장이 G7 회의를 앞두고 정의용 장관에게 “미국의 잘못된 장단에 따라가지 말라”고 한 정도다. 중국은 사드 갈등 이후 한국 내 높아진 반중 정서를 신경 쓰지 않을 수 없다. 중국의 입장을 거칠게 천명하는 ‘전랑(戰狼)외교’의 부작용에 대한 자성이 수위조절로 나타났을 수 있다. 내년으로 수교 30주년을 맞는 한·중관계가 이번 기회에 보다 건강해지기를 기대한다. 중국이 한·미 정상회담 결과를 쓴 약으로 받아들이면 좋을 것이다.
서의동 논설위원 phil21@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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