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와 세상] 기본소득 논의는 대선 후 차분하게
[경향신문]
20대 대선 1년을 앞두고 정치권에서 기본소득 논쟁이 다시 부각되고 있다. 기본소득 의제는 정책 및 체제 개혁과 관련한 많은 쟁점을 안고 있다. 그러나 대선 국면에서는 정교한 논의가 어렵다. 현실에 적용하는 방안에 대해서는 대선 이후 차분히 논의하는 것이 좋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정치적 구도 때문이다. 지난 대선에서는 이재명 지사와 기본소득은 모두 도전적 위치에 있었다. 그런데 이번 대선에서는 기본소득이 너무 이재명 브랜드로 인식되고 있다. 이재명 지사를 제외한 모든 대선 주자들이 이재명 지사와 대립하는 지점에서 기본소득 주장을 검증하는 구도가 형성되었다. 이렇게 되면 기본소득의 장단점을 객관적으로 논의하기 어렵다.
둘째, 정책적 조건이 변하고 있다. 기본소득 논의에 우호적 환경이 조성된 것은 코로나19 확산 초기였다. 팬데믹 공포에 유례없는 확장 정책이 실시되었다. 특히 복지 전달 채널이 정교하지 못한 미국 등에서 긴급구호의 일환으로 현금 지급이 이루어졌다. 한국에서도 재난지원금이 지급되었다. 그러나 충격과 회복은 부문 간·계층 간 격차를 확대했다. 이제 주요국에서의 급격한 회복이 인플레 우려를 낳고 있다.
셋째, 경제학계와 진지한 대화를 할 필요가 있다. 문재인 정부의 최저임금, 소득주도성장, 부동산정책 등이 다수 경제학자의 동의를 얻지 못한 점을 성찰해야 한다. 정책 담론의 장에서 주도력을 갖지 못하면 정책 효과를 가질 수 없다. 성장 문제에서는 고전파 및 신고전파 경제학에서 형성된 인식 틀이 강하다. 기본소득을 성장이나 경기 문제로 접근하면 기존 경제학계와 전면전을 벌여야 한다. 윤희숙 의원이 기본소득을 ‘수주성’(수요주도성장)이라고 비판하는 발언이 영향력을 갖는 이유를 숙고할 필요가 있다.
기본소득을 현실에 적용하려면, 정치적·사회적 합의가 진전되어야 한다. 우선 현행 복지정책과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를 논의해야 한다. 모든 개인에게 지급한다는 보편성 원칙은 현실의 복지국가 정책 틀 속에서 실현되도록 해야 한다. 이재명 지사는 우선 연간 20만~50만원, 정부 재정 10조~25조원의 프로그램을 논의한다. 그러나 이는 개인 생활에 충분한 액수가 아니다. 충분성 원칙을 추구한다면, 기초연금을 확대하여 노령기 기본소득을 우선 도입하는 데서 시작하는 것이 좋다고 본다.
재정 조달도 현실적 방안을 찾아야 한다. 기본소득은 일회적이 아니라 정기적·지속적으로 이루어지는 지출이다. 증세 없이 재정지출 구조조정과 비과세 감면 정비 정도로 대응해서는 안정적 재원 마련이 어렵다. 새로운 세목을 신설하거나 기존 세목에 대해 증세를 해야 한다. 국토보유세, 디지털세, 탄소세 등을 신설하는 것은 시간이 걸리고 성과를 확정하기 어려운 실험의 영역이다. 소득세, 법인세, 부가가치세 등 3대 세목에서 추가 세수를 확보하는 방안이 정공법이다. 소비세가 가장 일차적인 증세 대상이라는 것이 많은 재정학자들의 의견이다.
기본소득을 진정으로 정당화하려면, 사회 정의와 실질적 자유의 확충을 강조하고 합의를 이루어내야 한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사회적 차원에서 공유하는 부를 확보하는 과정이 중요하다. 사회적으로 형성된 자산에 대한 지대소득을 모든 개인에게 나누어준다는 관점, 중앙집권적 국가가 개인에게 과도한 권력을 행사하지 않게 한다는 관점이 결합된 공화적 자유주의 흐름이 만들어져야 한다.
사회의 일부에서부터 실질적 자유의 소유 영역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프루동에 의하면, 공유제는 평등과 법을 추구하고 사유제는 독립성과 비례균형을 추구한다. 그는 이들 요소를 함께 갖춘 제3의 형태를 “자유”라고 규정한 바 있다. 이러한 제3의 형태를 만드는 데 기여할 때, 기본소득은 사회 진보의 수단이 될 수 있다.
이일영 한신대 경제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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