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인 수녀의 詩편지](46)평화로 가는 길은
[경향신문]
이 둥근 세계에
평화를 주십사고 기도합니다
가시에 찔려 피나는 아픔은
날로 더해갑니다
평화로 가는 길은
왜 이리 먼가요
얼마나 더 어둡게 부서져야
한 줄기 빛을 볼 수 있는 건가요
멀고도 가까운 나의 이웃에게
가깝고도 먼 내 안의 나에게
맑고 깊고 넓은 평화가 흘러
마침내는 하나로 만나기를
간절히 기도하며 울겠습니다
얼마나 더 낮아지고 선해져야
평화의 열매 하나 얻을지
오늘은 꼭 일러주시면 합니다
- 산문집 <풀꽃단상> 중에서
꽃들이 떠난 자리엔 온통 초록의 잎사귀들로 가득하고 간간이 뻐꾹새 소리 들려오는 숲은 그 어느 때보다도 아름다운 나무들의 향기를 뿜어냅니다. 6월의 달력을 넘기다 보면 여러 기념일 중 아무래도 6·25 한국전쟁일에 눈길이 머뭅니다. 우리나라는 남한, 북한으로 나뉜 유일한 분단국가라는 것,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민족끼리 아직도 서로 불신하며 산다는 것, 분단과 비극의 주인공들임에도 그 사실을 자주 잊고 평화와 통일에 대한 갈망조차 거의 체념하고 산다는 사실이 마음을 아프고 슬프게 하는 6월입니다.
수도공동체에서 단 하루도 평화를 위하여 기도하지 않은 날들이 없지만 어떤 인터뷰에서 막상 평화에 대한 물음을 던지면 무어라고 말할지 몰라 당황해하는 저를 봅니다. 제 작업실 한 모서리에 세워진 40대 초반 잘생긴 남자의 사진을 보면 다들 ‘영화배우인가요?’ 묻는데 “1950년 9월 납치당하기 전에 찍은 걸로 추정되는 우리 아버지예요”라고 답하며 전쟁 당시 만 다섯 살이던 제가 기억하는 총소리, 방공호의 퀴퀴한 냄새, 트럭을 타고 부산으로 떠난 피란길 등등 몇 토막의 옛이야길 들려주기도 합니다. 행여라도 아버지의 소식 한 번 들을 수 있을까 하는 기다림 속에 내내 안타까워하시던 어머니, 아버지의 모습을 닮은 언니와 오빠도 이젠 다 저세상으로 떠났으니 그쪽에서라도 이산가족의 한을 풀 수 있었기를 소망해 봅니다. 맑고 부드럽고 고요한 이미지로서의 정적인 평화가 있다면 많은 고뇌와 갈등의 눈물 속에 빚어진 동적인 평화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많은 경우 이 평화는 한 개인을 넘어 공동선으로 확산되어 가는 평화, 안팎으로 개인과 나라를 성숙시키는 아름다운 평화일 것입니다. 평화에 대한 성가만 열심히 부르지 말고 지금부터라도 좀 더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이 되자, 작은 일부터 시작해보자 다짐하며 몇가지의 평범하지만 구체적인 실천사항을 적어보는 오늘입니다.
대단한 평화의 투사는 못 될지언정 일상의 길 위에서 내 나름대로의 ‘평화의 일꾼’ ‘평화의 도구’라도 되어보리라 마음먹으며 수첩에 적어보는 메모 몇가지. (1)공동체 안에서 우정의 평화를 깨뜨리는 험담이나 뒷담화의 악습을 삼가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 평화를 위한 중간 역할이 필요할 땐 지혜롭고 용기있게 대처하자. (2)우리나라 역사와 평화에 대한 좋은 책을 찾아 읽으며 꾸준히 공부하자. (3)나라를 다스리는 이들의 어떤 행동이나 방침에 대해 더러 못마땅해하거나 이의를 제기할 순 있지만 무심결에라도 내가 사는 나라를 함부로 비하하거나 저주하는 부정적 언어를 사용하지 말도록 하자. (4)‘기도해도 소용없다’는 소극적이고 낙담하는 태도를 지양하고 두 동강난 우리나라와 국민을 진심으로 걱정하며 작은 희생을 곁들인 기도를 꾸준히 바치도록 하자(십자가 옆에 대한민국 지도가 걸린 나무묵주를 찾아서 기도하기).
“…좀처럼 나라를 위해 기도하지 않고/ 습관처럼 나무라기만 한 죄를/ 산과 강이 내게 묻고 있네요/ 부끄러워 얼굴을 가리고 고백하렵니다/ 나라가 있어 진정 고마운 마음/ 하루에 한 번씩 새롭히겠다고/ 부끄럽지 않게 사랑하겠다고”(이해인 시 ‘우리나라를 생각하면’ 중에서). 전쟁으로 우울한 유년기를 보낸 그 꼬마가 이제는 70대의 노수녀가 되어 ‘도와주세요!’ 하며, 낡은 사진 앞에 두 손 모으니 딸에게 과자를 건네던 모습으로 웃으시는 아버지! 저 깊이 묻어둔 눈물샘이 올라오니 백신후유증인 몸살기를 핑계 삼아 오늘은 조금 울어야겠습니다.
이해인 수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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