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방이 무섭다"..한국의 디지털 성범죄, 세계의 '경고 사례' 되다

임재우 2021. 6. 16. 14:36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휴먼라이츠워치 한국 디지털성범죄 실태 담긴 보고서 발표
게티이미지뱅크
직장인 이예린(가명)씨는 자신에게 추근대곤 했던 유부남 직장 상사에게서 탁상형 시계를 선물 받았다. 이씨는 시계를 한동안 침실에 놓았다가, 다른 방으로 옮겨놓았다. 그런데 시계 위치를 옮겨놓자 묘하게도 상사는 ’시계를 원치 않으면 돌려달라’고 말했다.
수상한 느낌에 이씨는 시계의 기종을 인터넷에 검색했고, 상사의 선물이 “어둠 속에서도 완벽한 영상을 제공”하는 시계로 팔리고 있는 걸 발견했다. 한 달 동안 침실에 두었던 시계가 카메라가 달린 ‘특수시계’였고, 이씨의 방을 촬영해 상사의 휴대전화로 ‘스트리밍’해온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것이다. 이씨가 전화해 이를 따지자 상사는 무심코 “그거 검색하느라고 밤에 잠을 안 자고 있던 거야?”라고 대꾸했다. 밤 늦게 휴대전화를 들여다보고 있는 이씨의 모습을 자신이 봤다는 듯이 말이다.
판사는 “합의를 하면 어떠냐? 재판이 계속 진행되어도 당신에게 좋을 것이 없다”고 했지만, 이씨는 재판을 멈출 생각이 없었다. 결과적으로 상사는 1심에서 징역 10월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이씨는 여전히 종종 “내 방이 이유 없이 무섭다”고 했다. 항소심을 밟고 있는 이씨는 1년이 지난 지금까지 우울증과 불안증 약을 복용 중이다.

미국 뉴욕에 본부를 둔 국제인권단체 휴먼라이츠워치의 한국 디지털 성범죄 실태 보고서에 등장하는 한 피해 사례다. 휴먼라이츠워치가 16일 한국의 디지털성범죄 현황을 담은 보고서(“내 인생은 당신의 포르노가 아니다”-한국의 디지털성범죄)를 발표했다. 이 보고서에는 디지털성범죄 피해자·가족 12명과 관료·전문가 등을 38차례에 걸쳐 인터뷰한 내용이 빼곡히 담겼다. 보고서는 한국에 만연한 디지털 성범죄의 의미를 이렇게 설명한다. “한국은 급속한 경제 성장과 기술적 발전에 비해 성평등은 그만큼 빠른 속도로 발전하지 못했다. (한국의 디지털 성범죄는) 정부와 기업이 인권 중심적인 보호장치를 충분히 제공하지 않는 상태에서 기술적 혁신이 어떻게 젠더 폭력을 조장하는지를 보여준다.”

‘대학 동기·남자친구·모르는 남성’ 만연한 디지털 성범죄

“밖에서 화장실 가기가 겁이 난다. 꼭 가야 할 때는 변기, 벽 사이, 화장실 문, 경첩 등에 몰카가 설치되어 있는지 한참 확인한다. … 며칠 전에 동대구 기차역에서 화장실에 갔는데 거의 모든 칸에 다른 여성들이 막아놓은 구멍이 적어도 한 개 이상 있었다. 내 불안감은 근거가 없지 않았다. 끔찍하다.” (설문조사 응답자)

보고서는 한국의 디지털 성범죄를 크게 3가지 유형으로 나눴다. 동의 없이 불법촬영하거나, 동의를 받지 않고 촬영한 영상물·사진을 타인과 공유하거나, 사진·촬영물을 조작 또는 합성해 피해자들을 협박하는 유형 등이다.

인터뷰에 응한 디지털 성범죄 ‘생존자’들은 다양한 피해 상황을 증언했다. 한 대학생은 강의를 듣거나 밥을 먹는 여자 동기들을 몰래 촬영한 뒤 폴더별로 분류해 저장해놓았다가 친구들에게 발각되었다. 한 피해자는 남자친구의 휴대전화 속에서 자신을 포함해 이전에 사귀었던 연인들을 몰래 찍은 사진을 발견해 신고했고, 다른 피해자는 생면부지의 남성이 집 인근 건물 지붕 위에서 자신을 촬영하고 있다는 사실을 가해자가 경찰에 붙잡힌 뒤에야 알게 됐다.

불법촬영물이 하나의 ‘시장’을 형성하고 있다는 증언도 담겼다. 인터뷰에 응한 한 불법카메라 탐지 업체 대표는 불법촬영물을 팔아 이윤을 취하는 가해자들이 있다면서, 이들이 플랫폼 등과 공생 관계를 이룬다고 설명했다. 대부분 처음에는 성적인 만족감 때문에 시작하지만 “한 번 자료를 올리면 그 자료를 중심으로 (플랫폼과 다운로더 등의) 공동체가 형성”된다는 것이다. 이 업체 대표는 “1기가바이트 또는 1시간 반 분량의 동영상의 시장가가 500만원”이라고 말했다. 다른 업체 대표는 “운영자가 투자해 불법촬영 동영상을 사서 플랫폼에 올린 뒤 광고와 회비 등을 받아 투자금을 회수한다”고 했다.

수사·재판 과정에서 더 상처받는 피해자들

“가해자가 500만원도 안 되는 벌금형을 받을 건데 그래도 (공소제기를) 하실 건가요?” (한 검사가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에게 한 말)
“판사가 남자였는데, 최종 판결문에서 ‘(가해자가) 직업이 있고 최근에 결혼했고, 잘못을 크게 뉘우치고 있기 때문에 결정을 내리기 어려웠다’면서 집행유예를 선고했어요.” (불법촬영 피해자)

보고서는 피해자들이 수사기관의 디지털 성범죄에 대한 이해부족과 2차 가해성 질문, 소극적 대응으로 더 큰 상처를 입게 된다고 했다. 피해자들은 경찰이 “명예훼손으로 고소 당할 수 있다거나, 형량이 낮다거나, 외국 플랫폼이 관여된 경우 문제 해결이 불가능하다”는 등의 이유로 사건 접수를 아예 거부하는 경우가 있었다고 했다. 경찰이 디지털 성범죄 사건을 검찰로 넘긴 뒤에도 기소되지 않는 비율이 다른 사건보다 높은 점도 지적됐다. 보고서에 따르면, 불법촬영물 제작·유포에 대한 불기소 처분율은 43.5%로 살인 사건(27.7%)이나 강도 사건(19%)의 불기소 처분율보다 두 배 가까이 높다.

법원은 피해자의 고통보다 피고인에게 동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무단으로 자신과 다른 여성들의 사진을 촬영한 전 남자친구를 고발한 한 피해자는 “(남자친구가) 나이가 어리고, 기소된 것이 처음이었고, 미래가 유망하다”는 이유로 가해자가 벌금형을 선고받았다고 했다. 보고서는 2017년 디지털 성범죄로 체포된 가해자 중 2.2%만이 징역형을 선고받았다고 짚었다.

“디지털성범죄 피해자지원센터는 다른 국가 벤치마킹감…지원 강화해야”

보고서는 한국 정부에 △디지털 성범죄 양형·구제의 적절성을 조사하는 위원회 설립 △디지털 성범죄 생존자 지원 서비스에 충분한 기금 제공 △경찰·법조계 등에 여성 참여 제고 등을 권고했다. 또 피해자가 형사소송이 끝날 때까지 기다릴 필요 없이 가해자나 인터넷 사업자가 직접 특정 불법촬영물을 삭제하는 걸 강제할 수 있도록 민사상 구제절차를 강화하는 방법도 제안했다.

특히 보고서는 지난 2018년 4월 출범해 불법촬영물 삭제를 지원하고 있는 ‘디지털성범죄 피해자지원센터’의 역할에 주목했다. 피해자지원센터가 “중요하고 혁신적인 서비스로 유사한 문제로 씨름하는 다른 국가들에게도 모범이 될만하다”는 것이다. 헤더 바 휴먼라이츠워치 여성권리국 공동디렉터 대행은 “인터넷에서 이미지를 삭제하는 것은 전문적인 분야이고 생존자들에게는 최우선 순위에 있는 문제다. 다른 국가들도 벤치마킹할만한 굉장히 중요한 모델인데 센터 인력 상황이 좋지 않은 만큼, 정부에서 지원을 강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임재우 기자 abbado@hani.co.kr

Copyright © 한겨레.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크롤링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