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국회, 껍데기만 남은 중대재해법 개정 나서라

한겨레 2021. 6. 15. 1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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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상 과정서 후퇴 거듭 '누더기' 전락
'일터의 죽음' 막을 실효적 조항 절실
시행령으론 한계..법률 바로잡아야

‘중대재해 처벌 등에 관한 법률안’(중대재해법)이 국회를 통과한 1월8일, 자식을 가슴에 묻은 어머니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사람을 살리자는데 왜 국회의원들이 앞장서서 막는지 모르겠다.” 2018년 태안화력발전소에서 비정규직으로 일하다 컨베이어벨트에 끼여 숨진 김용균씨의 어머니 김미숙씨다. 법 통과를 촉구하며 한달 가까이 국회 본관 앞에서 단식농성을 벌여온 그는 농성 기간에 “이 법이 통과된다고 용균이가 살아오는 것도 아니지만 나 같은 엄마는 다신 없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자주 했다고 한다. 곡기를 끊으면서까지 간절히 염원한 법이 국회를 통과했지만, 산재 희생자 유가족들은 아쉬움을 곱씹으며 다시 투쟁을 다짐했다. 매일 6명이 일터에서 사고와 질병으로 죽어가는 참담한 현실을 바꾸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법이라고 봤기 때문이다.

중대재해법 제정을 촉구하며 단식에 들어갔던 고 김용균씨의 어머니 김미숙씨(가운데)가 지난 1월8일 저녁 중대재해법 제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뒤 국회 본관 앞 농성장에서 연 해단식에서 눈물을 닦고 있다. 왼쪽은 고 이한빛 피디의 아버지 이용관씨, 오른쪽은 강은미 정의당 원내대표. 강창광 선임기자 chang@hani.co.kr

내년 1월부터 시행되는 중대재해법에는 ‘누더기’, ‘종이호랑이’ 등의 꼬리표가 따라다닌다. 국회 협상 과정에서 후퇴를 거듭한 탓이다. 법안 이름부터가 그렇다.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의 첫 발의자인 박주민 의원이 제출한 법안명은 ‘중대재해에 대한 기업 및 정부 책임자 처벌법안’이었다. 책임의 주체를 명확히 했다. 그러나 국회를 통과한 법안에선 ‘기업 및 정부 책임자’란 말이 쏙 빠졌다. 법안 내용의 후퇴는 더욱 심각하다. 입법 취지 훼손을 넘어 형해화에 가깝다.

우선 적용 범위부터 보자. 5인 미만 사업장은 아예 이 법의 적용 대상이 아니다. 여야 의원들의 발의안 어디에도 없던 내용인데, 법안 통과를 이틀 앞두고 갑자기 ‘적용 제외’ 조항이 추가됐다. 50인 미만 사업장은 적용이 3년 유예됐다. 고용노동부 통계를 보면, 지난해 전체 산재 사고 사망자 882명(질병 사망 제외) 가운데 5인 미만 사업장 소속 노동자는 35.4%, 5인 이상~50인 미만 사업장 노동자는 45.6%에 이른다. 서류상 쪼개기 등을 통해 ‘가짜 5인 미만 사업장’이 늘어날 것이라는 우려도 크다.

처벌 수위도 무뎌졌다. 경영책임자의 징역형 하한선이 2년에서 1년으로 낮아졌고, 벌금형과 징벌적 손해배상액의 하한선은 아예 사라졌다. 인허가 및 감독 권한이 있는 공무원 처벌 특례 조항도 빠졌다. 이 법의 처벌 대상인 ‘경영책임자’ 규정이 불분명한 것도 문제다. 박주민 의원의 법안에서는 ‘법인의 대표이사 및 이사’로 명확하게 규정돼 있었는데, 국회 논의 과정에서 ‘사업을 대표하고 사업을 총괄하는 권한과 책임이 있는 사람 또는 이에 준하여 안전보건 업무를 담당하는 사람’으로 바뀌었다. 회사 대표이사가 처벌을 피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 것이다. 재계의 로비에 굴복했다고밖에 볼 수 없다. 경영책임자가 증거를 인멸하는 등 사고 원인 규명을 방해할 경우 중대재해가 발생한 것으로 간주하는 ‘인과관계 추정’ 조항도 통째로 빠졌다. 도대체 뭘 가지고 중대재해를 막겠다는 건지 의문이 들 정도다.

원청의 책임을 규정하는 조항이 포함되긴 했지만, 산재 사고 때마다 논란이 돼온 ‘위험의 외주화’를 막기에는 부족하다는 지적도 많다. 임대와 발주 부분이 빠졌기 때문이다. 임대 또는 발주한 사업에서 중대재해가 발생하면 원청의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얘기다. 예컨대, 지난해 4월 38명의 목숨을 앗아간 ‘이천 물류창고 화재 참사’의 경우 발주처의 무리한 공기 단축 요구가 한 원인으로 지목됐는데 앞으로 비슷한 사고가 발생해도 발주처는 중대재해법으로 처벌할 수 없다. 도급·용역 등에 있어서도, 원청의 책임을 포괄적으로 규정한 박주민 의원의 법안과 달리, 원청이 ‘실질적으로’ 지배·운영·관리하는 경우에 한해 책임을 물을 수 있도록 했다. 향후 법 적용 과정에서 혼선이 빚어질 공산이 크다. 산재 사망을 줄이기 위해서는 ‘안전 규제를 위반하면 더 큰 비용을 치르게 된다’는 인식이 확산돼야 한다. 노동자의 ‘목숨값’이 높아져야 한다는 얘기다. 안전·보건 의무를 소홀히 해 중대재해가 발생하면 엄한 법적 책임을 물을 수 있어야 경영자가 위험을 줄일 방안을 찾게 된다. 중대재해법의 입법 취지가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적용 제외와 유예, 처벌 완화로 점철된 지금의 법으로는 어림없다. 민주당은 현재 준비하고 있는 시행령으로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겠다지만, 모법에 중대재해를 줄일 실효성 있는 장치들이 빠져 있다는 점에서 한계가 명확하다. 법에도 없는 내용을 시행령에 담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마침 이탄희 민주당 의원이 경영책임자 등의 처벌을 강화한 ‘중대재해법 개정안’을 대표발의했다. 그동안 제기된 여러 미비점들을 바로잡을 기회로 삼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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