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루 애호가' 이근배 시인 "벼루요? 이중섭 '황소'와도 안 바꿀래요"

배문규 기자 2021. 6. 15. 18:33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경향신문]

이근배 시인이 15일 서울 가나아트센터에서 열린 소장품전에서 ‘정조대왕사은연’을 확대한 사진을 가리키며 벼루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연합뉴스

“우리나라의 벼루들은 압록강 기슭의 위원에서 나오는 화초석이 으뜸인데요. 녹두색과 팥색이 시루떡처럼 켜켜히 층을 이뤄서 마치 풀과 꽃이 어우러지는 것 같대서 이름도 화초석인데요, 거기 먹을 가는 돌에다 우리네 사는 모습이며 우주만물을 모두 새겨놓았는데요, 그 조각들은 사람의 솜씨가 아니라 귀신의 짓거리라고 밖에는 볼 수 없는데요, …”(이근배, 하동(河童) - 벼루읽기)

이근배 시인(81)은 ‘연벽묵치(硯癖墨癡·벼루에 미치고 먹에 바보가 된다)’의 벼루 애호가로 유명하다. 소장 벼루만 1000점 이상이고, 벼루에 관해 쓴 연작시만 80여 편에 이른다. 그가 아끼고 아낀 벼루가 일반에 처음 모습을 드러낸다. 대한민국 예술원 회장인 이근배 시인의 등단 60주년을 기념하여 그가 반평생 수집한 한국 옛벼루를 공개하는 가나아트센터 ‘해와 달이 부르는 벼루의 용비어천가’ 전시다. 15일 기자간담회에서 만난 이 시인은 “문방 문화는 한·중·일 세 나라가 공유하지만 벼루의 대종(大宗)이라는 중국 어느 시대 벼루도 그 규모나 회화성, 살아움직이는 극사실의 조탁이 조선 개국 무렵 벼루에 미치지 못한다”며 “한국의 벼루는 청자, 백자 못지않은 자랑거리”라고 말했다.

“사람들이 이런 벼루는 눈 생기고 처음 봤대요.”(웃음) 전시에는 엄선한 100여점의 명품 벼루가 출품된다. 녹두색과 팥색이 어우러진 위원석에 생동감 넘치는 문양이 베풀어진 위원화초석 벼루와 다산 정약용이 으뜸으로 꼽았다는 남포석 벼루를 중심으로 구성됐다. 위원석 벼루는 조선 전기 평안북도(자강도) 위원강의 강돌로 만든 것이며, 남포석 벼루는 19세기 이래 충청남도 남포군(보령시) 성주산에서 캐낸 돌로 만든 것이다. 투박한 검은색 벼루를 생각했다면 대단한 착각이다. 신묘한 빛깔의 사각틀 안에 학이 나래를 펴고, 포도잎에는 잎맥이 생생하다. 시원하게 뻗은 나무에는 원숭이가 앉아있다.

‘위원화초석 매죽문일월대연’, 조선 15~16세기, 26x41x3.4cm.
‘남포석 월송문연’, 조선 18세기, 24x30x2.7cm.
‘정조대왕사은연 正祖大王謝恩硯’ 앞뒤 모습, 중국 단계연, 20.2x27.7x3㎝.


큰 화면에 매죽문이 빽빽하게 채워진 ‘위원화초석 매죽문일월대연’, 검고 큰 석판에 화려한 조각솜씨를 펼친 ‘남포석 장생문대연’ 같은 것들이다. 작가가 가장 아끼는 벼루 중 하나라는 ‘위원화초석 기국농경장생문연’은 농부가 소로 밭가는 섬세한 모습이 일품이다. 정조가 자신과 아버지의 스승이었던 남유용에게 바친 ‘정조대왕사은연’은 1973년 창덕궁에서 열린 ‘명연전(名硯展)’에서 최고로 뽑힌 작품이다. 화가 김종학이 소장하다 재벌가로 갔던 것을 이 시인이 힘들게 구했다.

“벼루가 있어야 솔거도 있고, 추사도 있습니다. 옛날 선비들은 벼루를 연전(硯田)이라고도 했습니다. 선비는 벼루가 있어야 글농사, 그림농사를 짓는 것이죠. 또한 문방사우에서 종이, 붓, 먹은 소모품이지만, 벼루는 누대에 걸쳐 몇백년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선비가 재물 탐하는 건 부끄러운 일이지만 좋은 문방사우는 자랑으로 삼았다고 해요.”

독립운동가의 후손인 이 시인은 한학자인 할아버지의 남포석 벼루를 보며 자연스럽게 벼루에 관심을 가졌다고 한다. 처음 벼루를 수집한 것이 1973년. 당시 집 한 채 값인 100만원을 줬다고 한다. 이중섭 ‘황소’ 그림이 30만원 하던 시절이다. “지금도 이중섭 황소랑 바꾸래도 안바꿔요. 이중섭이 와도 벼루는 못 파잖아요”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처음에는 중국 벼루를 최고로 알고 수집하던 그는 1980년대 들어 본격적으로 한국 벼루의 아름다움에 빠져든다. 이상했던 것이 조선 전기의 그 아름다운 위원석 벼루를 임진왜란 이후에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당시 도공을 잡아갔듯이 벼루 장인들도 데려간 거 같아요. 일본 호류지에 갔는데 일월연이 있는 것이 아닙니까. 잡혀간 기술자들이 만들었겠구나 생각했죠.” 그때부터 부지런히 일본으로, 중국으로 다니며 한국 벼루를 모았다.

이 시인은 ‘자화상’에서 “글자를 읽을 줄도 모르고 붓을 잡을 줄 모르면서 지가 무슨 연벽묵치라고 벼루돌의 먹 때를 씻는 일 따위에나 시간을 헛되이 흘려버리기도 하면서”라고 자책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벼루 수집은 이제 ‘애국’이 됐다. “우리의 뛰어난 벼루를 자랑해 본적이 없습니다. 전시가 한국 벼루의 진면목을 대중에게 알리는 계기가 됐으면 합니다.”

배문규 기자 sobbell@kyunghyang.com

Copyright © 경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