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파이프라인' 소재에 비해 순진한 도둑들
영화 ‘파이프라인’은 대한민국 최초로, 송유관에 구멍을 뚫어 기름을 훔치는 ‘도유’라는 소재를 가져왔다. 영화계 대표 스토리텔러 유하 감독이 선보이는 첫 범죄 오락 영화로, 서인국과 이수혁이 각각 천공 기술자와, 도유를 의뢰한 정유회사 대표 역을 맡았다. 하지만 익숙한 외피를 쓴 조폭 영화로 기억되는 것은 왜일까.
도유 업계 최고 천공 기술자 ‘핀돌이’(서인국)는 어느 날, 수천 억 원의 기름을 빼돌리려는 정유회사 대표 ‘건우’(이수혁)의 제안을 받고 호남선과 경부선을 지나는 송유관에 구멍을 뚫기 위해 잠입한다. 여기에 조선소에서 잘린 프로 용접공 ‘접새’(음문석), 건축 공무원 30년 경력으로 땅속을 장기판처럼 꿰고 있는 ‘나 과장’(유승목), 괴력의 인간 굴착기 ‘큰삽’(태항호) 등이 합류하고, 이들을 감시하는 ‘카운터’(배다빈)까지 등장한다. 송유관에 구멍을 뚫는 몸값 최고의 천공 기술자 핀돌이 역의 서인국은 명품 옷을 입은 채 구멍을 뚫는 자신만만한 캐릭터다. ‘응답하라 1997’, ‘고교처세왕’, ‘하늘에서 내리는 일억 개의 별’을 거쳐 현재 인기리에 방영 중인 ‘어느 날 우리 집 현관으로 멸망이 들어왔다’에 출연 중인 그가 2013년 작 ‘노브레싱’ 이후 영화로 다시 돌아왔다. 대기업 후계자이자 핀돌이에게 도유 작전을 계획한 건우 역은 이수혁이 맡아, 다섯 도유꾼들을 한계까지 몰아붙이는 캐릭터를 연기한다. 영화의 첫 시작부터 등장하는 접새 역의 음문석은 한시도 쉬지 않는 입으로 말썽을 일으키는 트러블 메이커로, 오로지 자신만의 이익을 쫓는 개인주의적인 행동으로 팀원들을 위험에 빠트린다. 드라마 ‘열혈사제’에서 충격적 단발 머리 ‘장룡’ 캐릭터로 신스틸러로 자리매김한 음문석에게 기대한 것도 웃음 코드였으리라. 하지만 장르가 꼭 코믹이어야 했을까.
외국에서 일어난 도유 범죄로 인한 폭발 사고로 수백 명이 죽고 도로가 붕괴되고 도시가 날아가기도 하는 실제 사건에서 모티프를 얻었다는 ‘파이프라인’은 신선한 소재에 비해 개연성은 물론 스타일도 담보하지 못했다. 30년 경력의 건축과 전직 공무원으로 설계도에 나와 있지 않은 부분까지 땅속 구석구석을 꿰고 있다는 나 과장은 어딘가 어수룩하고, 땅 파는 철거 전문가 큰삽 캐릭터는 힘 대신 욱하는 성격만을 보여 주며, 프로 용접공이라는 접새의 전문 기술도 잘 드러나지 않는다. 이들 모두 나중엔 조폭들에 의해 모두 “땅이나 파라”며 막장으로 내몰릴 뿐이다. 그나마 드라마 ‘나쁜 형사’에서 까칠하지만 똑 부러지는 순경 역할을 맡았던 배다빈 정도가 상황 판단 빠른 감시자 카운터 역을 맡아 선방한다.
거대한 지하 공간과 설비, 대규모 가스 폭발 등을 살린 공간 프로덕션에 비해 CG 역시 상대적으로 조악하다. 관을 뚫는 천공이나 용접 전문가, 철거와 구조 전문가라는 각자의 전문성이 휘발된 자리에 1990년대 조폭 영화의 공식만 살아 있달까. 영화 ‘도굴’ 등 땅굴이나 금고 벽을 파서 문화재나 돈을 훔쳐 가는 영화들을 많이 봐서인지, 아날로그 식으로 땅을 파고 기름을 훔치는 과정은 새롭지 않다. 거기다 캐릭터들이 서로 뒤통수를 치거나 빌런과 대립하는 과정 역시 나른하게 펼쳐지고, 오로지 일확천금을 노리고 한자리에 모인 생면부지의 도유꾼들이 갑자기 우정으로 하나되는 과정도 석연치 않다. ‘말죽거리 잔혹사’, ‘비열한 거리’, ‘강남 1970’을 만든 유하 감독 연출에다, 대한민국 최초로 ‘도유’를 소재로 한 범죄 영화라는 카피는 꽤나 매력적이다. 캐릭터의 사연과 코믹 설정, 억지 반전 대신, 도유 작업 자체의 긴장감을 더 자세히 보여 줬다면 어땠을까.
[글 최재민 사진 곰픽쳐스]
[※본 기사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될 만한 줄거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784호 (21.06.22)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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