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육복·금니·시계'..특징 있는 무명 4명도 찾을 수 있을까

강현석 기자 2021. 6. 15. 1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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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15일 5·18민주화운동 무명열사 중 1명이 신동남씨로 확인되면서 5·18 당시 사망했지만 무명열사로 남은 사람은 이제 4명으로 줄었다. 무명열사는 5·18 직후 처음 묻혔던 망월동 묘역에서 2001년 국립5·18민주묘지로 이장됐다.

이장 대상이던 11명의 유해 중 6명은 당시 유전자분석을 통해 가족을 찾았다. 5명은 일치하는 유전자가 없었다. 하지만 이장과정에서 나온 유류품과 뼛조각 등은 이들의 신원을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다. 경향신문은 2016년 5월 5·18민주화운동기록관에 보관 중이던 무명열사의 유류품과 유해발굴기록을 통해 이들의 신원을 추적했다.(경향신문 2016년 5월14일자 1면·8면·9면)

5·18진상규명조사위원회가 신원을 확인한 신씨는 당시 경향신문 분석과 상당부분 일치한다. 각종 기록에 추정 나이가 아예 적혀있지 않았던 신씨는 분석 결과 30대 중반으로 추정됐다. 척추 부근에서 수술 등에 사용하는 스테인리스 재질의 철사가 나온 점도 특징이었다. 만 30세로 확인된 신씨는 오차를 감안하면 추정 나이와 거의 일치한다. 그가 총상을 당한 후 수술을 받은 것도 사실로 확인됐다.

2001년 무명열사의 유전자 분석을 진행했던 박종태 전남대의대 법의학교실 교수는 이날 “신동남씨의 신원 확인을 검증한 뒤 당시 발굴 자료를 다시 봤다. (신씨가)수술한 흔적들도 유류품으로 보관돼 있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5·18진상규명위는 나머지 4명의 신원을 확인하기 위한 작업에도 본격적으로 착수했다. 조사관은 경향신문이 무명열사를 추적하며 분석했던 자료도 일부 요청했다. 5·18진상규명위는 16일에는 광주 숭의과학기술고등학교를 찾아 조사를 진행한다. ‘무명 4’가 입고있던 체육복에 찍힌 교표가 이 학교와 거의 일치하기 때문이다.

‘무명 4’가 입고있던 교표가 찍힌 체육복. 5.18민주화운동기록관 제공

교표는 1959년 개교 이후부터 현재까지 숭의고가 사용하고 있는 것과 모양이 같다. 3개의 나뭇잎 가운데에 톱니바퀴가 있고 그 안에 고등학교를 의미하는 ‘고’ 자가 한글로 쓰여 있다. 학교 관계자는 “톱니바퀴는 공업계 고등학교임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사망 당시 나이가 20세 초반으로 추정된 것을 감안하면 그는 숭의고 졸업생이거나 가족 중에 이 학교를 다녔던 형제가 있었을 확률이 높다.

5·18진상규명위는 1980년을 전후해 운영됐던 광주 지역 치과를 대상으로도 조사를 진행 중이다. ‘무명 3’의 특징이 ‘치아’ 이기 때문이다. 나이가 16세 전후로 추정되는 그는 사망 당시 학생 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유품은 ‘붉은 양말’이 전부였지만 유골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윗니에서 금니 1개가 발견됐다. 또 앞니가 빠진 것으로 추정된다.

금니가 발견됐다는 것은 그가 ‘치과 치료’를 받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당시 유해 발굴에 참여한 윤창륙 조선대 치과대학 교수는 “1980년에 치과 치료를 받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고 금니는 어느 정도 가정 형편이 뒷받침 돼야 했다”고 분석했다.

‘무명3’이 신었던 붉은색 양말. 5.18민주화운동기록관 제공

나이가 50대 중반으로 추정된 ‘무명 2’는 발굴 과정에서 왼쪽 팔에서 본체와 줄이 다른 금속 재질의 시계가 수습됐다. 본체는 프랑스 브랜드 ‘엘리다(ELIDA)’, 밴드는 국산 ‘오리엔트(ORIENT)’ 였다. 엘리다는 1980년대 초까지만 해도 짝퉁 시계로 유통됐다.

오리엔트 관계자는 “프랑스 시계를 착용하다가 망가진 밴드와 같은 제품을 구하지 못해 비슷한 오리엔트 밴드로 교체했을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면서 “당초 시계줄은 가죽이었을 수도 있다”는 분석을 내놨다.

‘무명 2’가 착용한 시계와 시계줄. 5.18민주화운동기록관 제공


‘무명 5’는 관도 없이 쌀 포대에 담겨 묻혔다. 만 4세로 추정되는 남자 아이다. 분홍색 여자 스웨터에 쌓여 있었고 회색바지가 나왔다. 5·18진상규명위는 최근 이 아이가 1980년 5월24일 남구 효덕동에서 공수부대원이 쏜 총에 맞아 숨졌다는 계엄군의 진술을 확보하고 추적중이다.

‘무명 5’가 입었던 분홍색 상의. 5.18민주화운동기록관 제공


5·18진상규명위는 이 외에도 추가 유전자분석을 통해 무명열사의 신원을 확인하는 방안도 병행한다. 송선태 5·18진상규명위원회 위원장은 “무명열사와 행방불명자를 찾기 위해서는 보다 치밀하고 유기적인 조사가 필요하다”면서 “5·18 관련 행방불명으로 신고한 242 가족중 196가족 376명의 유전자가 채취된 만큼 이를 다시 대조하는 작업도 진행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강현석 기자 kaja@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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