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관계의 역사 경험과 도쿄올림픽

한겨레 2021. 6. 15. 1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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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조선이 일본을 대하던 그와 같은 방식이 국가 운영의 정도였다.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다. 일본에서 "원수인 적은 모두 죽여라, 조선인은 모두 죽여라"와 같은 피켓을 높이 들고 험악한 구호를 외치는 시위대가 대도시를 휩쓸고 다녀도 한국에서는 일본을 향한 그런 시위나 구호를 생각할 수 없다. 그것이 우리 상식이다. 일본을 이웃으로 대하며 그 시민의 양식에 말 걸기를 그만둘 수 없다.
도쿄올림픽 개최 예정일이 약 40일 앞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최근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에서 일본이 한-일 약식 회담을 일방적으로 무산한 데 대한 비판이 커지고 있다. 앞서 독도를 일본 땅으로 주장하며 갈등이 커진 상황이었다. 시민단체 ‘서울겨레하나’ 회원들이 지난 8일 오전 서울 종로구 일본대사관 앞에서 도쿄올림픽 독도 일본영토 표기 중단과 욱일기 사용 금지를 촉구하고 있다. 연합뉴스

[기고] 오수창 ㅣ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도쿄올림픽 조직위원회가 누리집에 게시한 일본 지도에 독도를 감추어둔 사실이 밝혀진 데 이어 일본 당국자의 언행이 나날이 거칠어지고 있다. 우리는 차오르는 공분을 국가 운영의 정도(正道)와 국익을 지키는 동력으로 삼아야 한다.

시대 조건이 다른 과거의 사례를 오늘날 문제에 직접 적용할 수는 없지만, 역사 경험의 밝고 어두운 측면을 고루 성찰하여 판단 자료로 삼는 일은 중요하다. 1727년 조선인 표류민을 데리고 온 일본 사절은 동래 왜관에서 3년째 귀국을 거부했다. 바다를 사이에 둔 조선과 일본이 자기 땅에 표류한 상대편 백성을 구해주는 관습은 당연하고 아름다운 전통이다. 하지만 해류로 인해 조선인이 훨씬 많이 표류했으며 그들을 데리고 온 사절에 대한 조선의 접대가 극진한 데서 문제가 시작되었다. 조선 정부는 40명이 넘는 인원이 55일 머무르게 되어 있던 사절 일행에 대해 체재 비용은 물론 성대한 의례와 연회를 일곱차례 베풀고 그 모두에게 비단, 모시, 면포, 붓, 먹 등을 선물로 주었다. 또한 거울과 같은 일본 특산품을 받고 인삼, 호피 등을 내준 교역도 저들에게 막대한 이득을 안겼다. 따라서 조선과의 외교 업무를 수행하던 대마도에서는 기회만 되면 사절을 파견했다. 한해에 10회 넘게 올 때도 많았고, 세차례 사절이 동시에 머무는 때도 있었다고 한다(이훈, <조선후기 표류민과 한일관계>).

조선 정부는 1682년에 일본과 약조를 맺어 대마도에 조선인이 표류한 경우 배가 부서지고 사람이 죽지 않았다면 따로 사절을 보내지 말고 오가는 다른 인편에 그들을 데리고 오게 했다. 하지만 일본은 약조를 달리 해석하면서 계속 많은 사절을 파견했고 기한을 넘겨 머무르기가 예사였다. 1727년에 온 문제의 사절 또한 조약에 어긋났지만, 조선 정부는 접대를 거절하지 못했다. 다만 그들에게 발급한 외교문서에 그 접대를 전례로 삼을 수 없다는 구절을 넣어 다음에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했다. 그러자 일본 사절은 그 글귀를 빼주기 전에는 돌아갈 수 없다고 버텼다. 국왕 영조는 결국 그들 요구를 수용하라고 명령했다.

위 사례에서 되짚어볼 첫번째 면모는 국가 운영과 외교의 원칙이다. 일본 사절의 요구를 3년이나 끌다가 그대로 수용했으니 언뜻 보기에 허망하기조차 하지만, 필자는 조선 조정의 고민을 이해할 수 있다. 일본 사절은 그대로 돌아가면 본인은 물론 대마도주 또한 막부의 처벌을 받게 되므로 결단코 살아서는 물러날 수 없다고 버텼다. 그것은 공문의 표현이고, 실제로는 자기 나라에서 처형당하나 조선에서 죽으나 마찬가지니 갈 데까지 가보자는 태세였다. 조선 조정에서는 일본 사절이 자살하거나 사람을 해칠까 걱정해야 했다. 조선이 같은 방식으로 대응한다면 일본 사절을 퇴거시키라는 명령을 이행하지 못한 동래부사나 훈도를 처형해야 했다. 그러나 조선은 자기 관원을 그렇게 처형하기는커녕 외국 사절을 자해나 협박으로 대하는 나라가 아니었다. 그 사건으로부터 10년이 지나 조선은 일본으로부터 죽은 사람이 있을 때만 사절을 파견하겠다는 약속을 받아 문제를 해결했다. 조선이 일본을 대하던 그와 같은 방식이 국가 운영의 정도였다.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다. 일본에서 “원수인 적은 모두 죽여라, 조선인은 모두 죽여라”와 같은 피켓을 높이 들고 험악한 구호를 외치는 시위대가 대도시를 휩쓸고 다녀도 한국에서는 일본을 향한 그런 시위나 구호를 생각할 수 없다. 그것이 우리 상식이다. 오늘날 일본 집권자들의 주장과 정책이 터무니없어도, 일본 사회의 여론이 어떠하든, 싫건 좋건, 일본은 우리가 도움을 주고받으며 함께 살아가야 할 이웃이다. 추궁할 것은 추궁하고 요구할 것은 요구하되, 우리는 일본을 이웃으로 대하며 그 시민의 양식에 말 걸기를 그만둘 수 없다.

둘째, 국가 간 교섭의 한계, 즉 다른 나라의 문제를 우리가 모두 고쳐줄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18세기 일본 사절의 자해성 협박에 대해 조선 정부가 같은 수준에서 대응할 수는 없었다. 독도에 대한 일본의 주장도 마찬가지다. 도쿄올림픽 조직위는 처음에 독도를 포함한 일본 지도를 내걸었다가 우리가 항의하자 독도가 보이지 않는 지도로 바꾸었다. 우리는 그처럼 명확히 드러난 사실을 확인하면 충분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혹시라도 훗날 일본이 ‘올림픽 관련 지도에서 독도를 지웠지만 확대하면 드러나도록 숨겨두었다’ 하고 딱한 주장을 펴더라도, 일본 영토와 다른 색깔로 희미하게 그려 넣은 표시가 국제적으로 일본의 영토권을 주장하는 근거가 될 수 있을까? 대한민국은 명확하고 정당한 근거 위에서 독도에 대한 모든 권리를 누리고 있다. 도쿄올림픽 조직위의 조잡한 얕은수를 하나하나 점검하며 정색할 필요가 있을지 의문이다.

셋째, 부당한 부담과 피해가 없어야 한다는 중요한 문제가 있다. 조선시대에 일본을 관대하게 대하기 위해서는 큰 부담을 져야 했다. 외국에 대해서든 국내적으로든 오늘날 우리가 그래서는 안 된다. 독도에 대한 일본의 강변은 쉬 사그라들 문제가 아니다. 그에 대처하는 우리는 호흡을 길게 가지고 불필요한 역량 소모를 피해야 한다. 다행히 정치권에서는 그 문제를 국내 정쟁의 주제로 삼지 않는다고 모두 동의한 듯하다. 일본에 대한 정책을 두고 의견이 다를 수 있으나 토론을 넘어 대립으로 나아갈 필요는 없다. 필자는 독도가 보이지 않도록 바뀐 일본 지도를 굳이 확대해서 점검해야만 했는지 회의적이지만, 그렇게 해서 일본의 얕은수를 검증하고 항의하는 행동 또한 잘못을 바로잡으려는 엄정함이라고 높이 평가한다. 일본이 올림픽 지도에 독도를 완전히 지우지 않는다면 도쿄올림픽을 보이콧해야 한다는 충정이 곳곳에서 표출된다. 국제사회에 이번 사건의 옳고 그름과 독도가 대한민국 영토임을 명확히 알리는 일에 게을러서는 안 된다. 하지만 올림픽 불참에는 우리 사회의 희생이 뒤따른다. 고된 땀방울을 흘리며 오랜 시간 올림픽을 기다려온 우리 선수들을 실망시킬 필요는 없다. 아니 그보다 훨씬 작은 희생이라 해도, 독도에 대한 우리 권리에 한치의 흔들림도 없는데 부당한 일본의 행위 때문에 우리가 그것을 감내할 이유는 없다.

이번 올림픽을 보이콧하자는 견해에는 충분한 근거가 있다. 그렇게 결정된다면 필자는 흔쾌히 승복할 것이다. 하지만 필자의 현재 의견은 다음과 같다. 방역과 안전만 보장된다면 다가오는 도쿄올림픽에 대한민국의 젊은이들을 내보내고 나아가 그 성공에 기여하게 하자. 우리는 국가 운영의 정도와 국익을 일치시킬 수 있다. 지금까지 그래 왔듯이 넓고 곧은 길을 당당하게 걸어갈 때 우리는 흔들림 없이 독도를 지키고 힘과 억지를 앞세우는 국제관계를 선두에서 고쳐나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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